“기업 인·적성검사 기출문제집을 벌써 몇 권이나 풀었는지 모르겠네요.”
2년째 취업을 준비 중인 문모(28) 씨의 말이다. 국내 대기업의 상반기 채용 시즌을 맞아 채용시험의 일부로 치르는 인·적성검사 때문에 취업준비생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이 검사를 통과해야 면접을 볼 수 있다 보니 취업이 절실한 일부 취업준비생은 사교육까지 받고 있다.
시험이라는 객관적 지표를 바탕으로 채용하겠다며 도입한 인·적성검사지만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취업준비생에게는 오히려 적잖은 부담이 되고 있다. 인·적성검사는 삼성이 SSAT(Samsung Aptitude Test·현 GSAT)를 1995년 도입한 이후 국내 대기업에 퍼진 채용 절차다. 이 검사는 크게 조직 적응력을 평가하는 인성검사와 직무 적성을 평가하는 적성검사로 나뉜다. 적성검사는 일종의 지능검사로 언어능력, 자료해석능력, 수리력, 공간지각력 등을 묻는 객관식 문항으로 이뤄져 있다.
인 · 적성검사 위해 사교육까지 불사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가 지난해 11월 취업준비생 1094명과 사회초년생 55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취업준비생의 59.8%가 ‘광범위하고 어려운 인·적성검사가 부담’이라고 응답했다. 이미 기업에 입사한 사회초년생의 52.3%도 ‘취업을 준비할 때 각 기업의 인·적성검사까지 대비해야 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고 답했다.이 때문에 취업준비생은 대부분 기출문제집을 푸는 등 인·적성검사에 대비해 별도로 공부한다. 올해로 3년째 대기업 공채에 도전하고 있는 김모(27·여) 씨는 “인·적성검사 문항의 난이도는 정규교육 과정을 밟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풀 수 있는 정도다. 하지만 시험시간이 짧아 문제를 다 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문제 유형을 익히고자 매번 기출문제집을 사서 풀어본다”고 밝혔다.
3월 24일 인터넷 취업정보 사이트 잡코리아가 발표한 취업준비생 48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2.9%가 ‘대기업 인·적성검사에 대비해 공부하는 중’이라고 답했다. 일부 취업준비생은 인터넷강의를 듣기도 한다. 취업준비생 박모(28·여) 씨는 “서른 살이 넘으면 기업에서 신입사원으로 뽑기를 꺼린다는 얘기를 듣고 이번에는 꼭 취업에 성공해야겠다 싶어 인터넷강의를 들어가며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인적성검사 인터넷강의’를 검색하면 강의당 7만~9만 원선의 인·적성검사 강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기업들은 인·적성검사를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인사 관계자는 “매년 기업이 원하는 세부 인재상이 달라지게 마련이고, 그에 따라 인·적성검사 유형도 바꾼다. 따라서 기출문제를 풀고 인터넷강의를 듣는 것이 점수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각 기업 공채에서 인·적성검사 결과 때문에 탈락하는 인원은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 인·적성검사가 부담스럽다는 얘기는 취업준비생들이 처한 상황이 워낙 힘들다 보니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취업 전문가들의 진단은 정반대다. 취업전문 컨설팅 업체 커리어웨이의 박우식 대표는 “대기업의 인·적성검사는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푸는 것이 관건이다. 따라서 문제 유형을 익혀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대다수 취업준비생이 기출문제를 풀거나 모여서 스터디를 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기출문제 등으로 공부한 응시생이 그렇지 않은 응시생에 비해 합격률이 높다”고 밝혔다.
“공간지각력이 직무 적성과 무슨 관계?”
일부 취업준비생은 기업의 인·적성검사가 직무 적성을 평가하는 데 적절한 방식인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취업준비생 정모(26·여) 씨는 “다양한 직군에 지원한 사람들의 직무 적성을 IQ(지능지수) 테스트식의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백번 양보해 독해력이나 추리력은 여러 직무 환경에서 사용될 수 있다고 쳐도, 공간지각력은 어디에 쓰려고 평가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문형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적성검사가 단순히 지능을 검사하는 시험이라 해도 직무능력과 무관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지능지수검사 결과가 높게 나올수록 직장 내에서 업무 적응이 빠르다는 해외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나 이는 대략적인 업무 적응력이 좋았다는 것일 뿐이지, 한 가지 시험으로 다양한 직군에 지원한 사람들의 직무 적성을 일괄되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과연 입사시험 같은 일괄 시험이 인재를 채용하는 합리적 방법인지 고민이 필요한 시기”라고 진단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몇몇 대기업은 인·적성검사 가운데 일부를 없애기도 했다. 한화그룹은 2013년부터 인·적성검사 대신 각 계열사가 자체적으로 지원자를 평가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지원자들의 부담을 경감하는 동시에 직무역량 중심의 선발을 강화하고자 적성검사를 폐지하고 계열사 자체 평가를 도입했다”고 밝혔다. 신세계그룹은 애초부터 인성검사는 있었지만 적성검사는 따로 보지 않았다. 그 대신 PT면접(발표면접)으로 응시자를 솎아낸다.
하지만 여전히 인·적성검사를 시행하는 기업들은 이를 포기할 마음이 없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인·적성검사는 점수로 지원자를 솎아내려는 시험이라기보다 각 기업의 조직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적 성격이 강하다. 게다가 대다수 기업이 다양한 직무에 지원한 인재들의 직무 적성을 제대로 평가하고자 검사 형식과 내용을 조금씩 바꾸는 추세”라고 말했다.
한편 일부 취업준비생은 자신이 치른 인·적성검사 결과를 궁금해한다. 각 기업의 인·적성검사 유형이 비슷하니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준비한다면 다른 기업이나 다음 공채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서울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이모(28) 씨는 “서류전형이나 면접전형과 달리 인·적성검사는 객관식의 정량적 시험이다.
따라서 결과를 확인한다면 내가 왜 거기에서 탈락했는지 명확히 알 수 있고 다음 공채를 준비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기업이 대부분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의 인사 담당자는 “취업준비생은 인·적성검사를 정량적 평가라고 인식하지만 기업에서는 정성적 평가 자료로 활용한다. 따라서 인·적성검사 고득점과 합격이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많게는 수만 명에 달하는 지원자의 점수 공개를 담당할 직원 배치 등 그에 들어가는 추가 비용도 꽤 큰 부담”이라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