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 사교육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거죠.”
경기 성남시 한 중고교 교과 전문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는 김모(34) 씨의 말이다. 교육 당국이 학교생활기록부종합전형(학종) 확대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비중 축소, 내신 절대평가화 등으로 대학 입시 기준을 교과 성적 위주의 정량평가에서 학교생활과 성실성을 평가하는 정성평가로 바꾸고 있다.
이 때문에 교과 위주의 사교육업체들은 어쩔 수 없이 비교과활동 위주의 진학 컨설팅업체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입시 전문가들은 공교육이 제구실을 한다는 전제 아래 정성평가 위주로 입시제도를 바꾸면 사교육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선 학교가 비교과활동 체험 과정을 제대로 마련한다면 사교육이 대입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크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사교육업계 비교과활동 영역 적극 흡수 중
김씨는 “정부의 대입정책이 수시모집 위주로 변하자 지난 한 해 단과학원에서는 수능보다 학종을 노리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내신 대비에 신경을 썼다. 학교에서 출제하는 시험이라도 교과내용을 선행학습한 학생이 고득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육부에서 내신마저 절대평가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소형 학원들은 수강생 감소를 걱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2월 고교 내신의 완전 절대평가화를 검토하는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최종 결과는 7월 무렵 2021학년도 수능개편안과 함께 발표될 예정인데, 절대평가가 도입될 공산이 크다. 지은림 경희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새 교육과정의 핵심 취지인 ‘결과가 아닌 과정 중심의 평가’를 고려하면 앞으로 내신은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변화하고 대입에서 학습태도 등 교내활동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수능 축소와 내신 절대평가 도입으로 학습 부담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진 만큼 사교육 수요가 줄어들 듯 싶지만, 오히려 사교육비는 늘어났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학생 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5만6000원으로, 2015년 24만4000원에 비해 1만2000원(4.8%) 늘었다.
이 중 고등학생의 사교육비는 23만6000원에서 26만2000원으로 10.9%가량 증가했다. 안선회 중부대 진로진학컨설팅학과 교수는 “기존 교과 내신, 수능, 논술 사교육비에 비교과활동 대비 서류·면접 및 컨설팅 사교육비까지 추가되면서 비용이 늘어난 것”이라고 진단했다.
학교생활을 평가하는 학종마저 사교육업체가 잠식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들 업체의 발 빠른 대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양천구 한 대형 사교육업체 관계자는 “수능이나 내신이 자격시험이 되면 사교육 수요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선행학습으로 진도를 빨리 끝내놓으면 학종 준비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교과과정 선행학습을 원하는 수요는 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따라서 대형학원에서는 지난해 초부터 수능이나 내신 강의는 단기완성반으로 축소하면서 학종에 대비해 진학 컨설팅업체와 손잡거나 교내 대회 대비 글짓기·논술 강의를 신설하는 등 본격적으로 학종 관련 사교육에 뛰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1년 사이 학생부 수시모집 관련 사교육업체가 크게 늘었다고 말한다. 올해 초까지 대입 자기소개서 첨삭 아르바이트를 했던 양모(26·여) 씨는 “지난가을까지만 해도 자기소개서를 첨삭해주는 대가로 건당 20만~30만 원을 받았는데 최근 대형업체가 진학 컨설팅에 뛰어들고 관련 업체가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건당 5만 원대까지 떨어졌다. 지금은 서울 강남 대치동에서 합격률이 높기로 유명한 자기소개서 첨삭이 건당 30만 원 선인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유은혜 의원과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전국 고교의 학생, 학부모, 교사 2만4912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대입전형 인식실태 조사’ 결과를 2월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 ‘사교육을 가장 많이 유발하는 대입전형’으로 학종을 꼽았다(학생 27.5%, 학부모 29.4%, 교사 25.2%).
컨설팅 사교육 필요 없어
학부모와 학생이 컨설팅업체에 거금을 줘가며 학종을 준비하려는 이유는 불안감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자녀를 둔 인천의 윤모(45·여) 씨는 아들이 중학생인데도 벌써 진학 컨설팅을 고려하고 있다. 윤씨는 “학부모 모임에서 ‘대입제도가 복잡해져 중학생 때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야 서울권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를 들었다. 비용이 부담되기는 하지만 아이의 미래를 위해 (진학 컨설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그러나 입시 전문가들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사설업체에서 컨설팅까지 받아가며 대입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강남엄마의 정보력’의 저자인 김소희 교육 컨설턴트는 “의대나 최상위권 대학의 인기 학과를 지망한다면 경쟁이 치열해 면접 등 일부 사교육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학생부 관련 전형을 통해 공교육만으로도 충분히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최상위권 대학의 인기 학과를 지망할 학생이 아닌데도 불안한 마음에 사교육시장에서 컨설팅을 받는다면 오히려 진학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후죽순 생긴 진학 컨설팅업체 가운데 제대로 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곳도 많다. 심한 경우 업체의 이익을 위해 진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활동을 학생에게 강요하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대치동 샤론코치’로 잘 알려진 이미애 입시컨설턴트는 “학생부 관련 전형은 학생과 학부모의 관심 및 노력 여부에 따라 사교육비를 크게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일각에서는 학생부 관련 전형으로 대학에 가려면 중학생 때부터 특수목적고교(특목고) 등의 입시를 치르는 것이 유리하다는 지적이 있다.
물론 일부 특목고나 자립형사립고(자사고)는 교내 비교과활동 프로그램이 일반계 고교에 비해 잘 갖춰져 학종에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고 중에서도 특목고 못지않게 비교과활동을 탄탄하게 준비해놓은 곳이 많다.
따라서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사교육을 통해 특목고 진학을 노리기보다 진로를 확실히 정하고 관련 학과에 진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갖춘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원하는 학교에서 내신 관리와 학교생활을 충실히 한다면 사교육 없이도 충분히 서울 소재 유명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사교육, 공교육 나태의 반사이익 보는 것
사교육업계에서도 학종이 대입에서 사교육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는 데 이견은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입 컨설팅업체 관계자는 “전국의 모든 고교가 다양한 특성화 프로그램과 대학 입시제도를 잘 아는 진로·진학 교사를 갖춘다면 사설 진학 컨설팅업체는 대폭 줄어들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하지만 모든 일반계 고교가 새로운 대입제도에 준비가 잘돼 있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이 업체에 가져오는 학생부를 보면 각 학교의 진학지도 수준의 차이가 너무 크다. 준비돼 있는 학교는 입시 명문고 부럽지 않게 학생의 이력을 관리하는 반면, 학생부 공란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곳도 종종 있다.
정부가 사교육을 사회 문제 취급하면서 공교육을 정상화한다며 대학 입시제도를 전면 수정해도 공교육이 제구실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교육이 ‘학교생활 중심’의 대입제도라는 큰 위기를 피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평했다. 김소희 컨설턴트도 “현 학종은 대학이 학생과 그 학생이 다니던 고교를 함께 평가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려는 학생의 노력만큼이나 각 고교의 진학지도 시스템도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에 김영심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대입상담센터장은 “각 대학이 발표한 진학정보를 정보공개시스템을 통해 바로 학생들이 볼 수 있게 하고, 일부 민감한 정보는 각 학교 진학지도 교사에게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를 통해 대입 수험생의 혼란을 줄이고 일선 학교의 진학지도 능력을 높여 학생들이 사설 컨설팅업체를 찾지 않아도 교내에서 충분히 대입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