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건이 될 것인가. 그랬다. 황교안 국무총리도 같은 길을 걸을까. 그럴 개연성이 높다. 황 총리는 그냥 눌러앉기만 하면 그만이긴 하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중도 하차는 정치사적 의미를 지닐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어떤 정당도 고위관료 출신을 대권주자로 영입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고위관료 출신으로 대통령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이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이회창 전 총재다. 두 차례나 대통령선거(대선) 초기 대세론을 등에 업었지만 패배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고건 전 총리다. 고 전 총리도 대선 초기 대세론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허무하게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이들은 왜 실패했을까. 특히 고건과 반기문은 왜 중도 포기하고 말았을까.
고건 전 총리는 소년 급제한 인물이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해 약관 23세에 전남 곡성군 군수로 취임했다. 37세에 최연소로 전남도지사에 올랐다. 이후에도 승승장구해 강원도지사, 대통령비서실 정무제2수석비서관을 거쳐 전두환 대통령 시절 마침내 내무부 장관에 오른다. 그때 그의 나이 49세였다. 그 후 교통부 장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명지대 총장, 서울시장을 거쳐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처음 국무총리가 됐고 노무현 정부에서 다시 국무총리에 올랐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행정의 달인’이다. 그의 관료생활은 순풍에 돛을 단 격이었다.
반기문 전 총장 역시 성공적인 관료생활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1970년 제3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후 72년 주인도 대사관 재직 당시 노신영 주뉴델리 총영사와 인연을 맺은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노 전 총영사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 외무부 장관, 국가안전기획부장, 국무총리를 거친 외교 실세 가운데 한 명이다. 그가 85년 국무총리에 취임한 후 국무총리비서실 의전비서관으로 발탁한 사람이 바로 반 전 총장이다. 이 시기 반 전 총장은 선배들까지 제치고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행운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90년 외무부 미주국장, 95년 외무부 외교정책실장, 96년 외무부 제1차관보를 거쳐 김영삼 대통령 시절 대통령비서실 의전수석비서관으로 기용됐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까지 맡았다. 이후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외교통상부 차관으로 발탁됐고,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외교통상부 장관을 거쳐 유엔 사무총장에 올랐다. 외교관들에게 그는 로망이자 전설이다.
“내가 결정하면 따라야”
청년 급제한 인물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자기애와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는 태도의 겸손함과는 다른 문제다. 최근 잉아브리트 알레니우스 전 유엔 내부감찰실장은 반 전 총장에 대해 이렇게 폭로했다. “그가 스웨덴 대통령으로 출마한다면 나는 절대 찍지 않을 것이다.” 그는 2010년 7월 반 전 총장과 관련된 50쪽 분량의 보고서를 남기고 사퇴한 인물이다. 알레니우스 전 감찰실장은 2011년 발간한 ‘미스터 찬스 : 반기문 재임 기간 중 쇠퇴한 유엔’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반 총장은 자신에 직언하는 인사에게 거의 화를 내거나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반 전 총장은 대인관계가 원만하기로 소문난 인물이다. 부하직원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태도가 겸손한 것이다. 하지만 알레니우스 전 감찰실장의 말을 들어보면 그에게는 또 다른 측면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귀국 후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대선 불출마 선언이라는 중대한 결정 과정에 핵심 참모를 참여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불출마 선언 직후 사석에서 반 전 총장은 이런 말을 남겼다. “아내와 심각하게 논의,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게 낫겠다 결심했다.”
귀국 초기 민생행보 과정에서 잦은 실수가 발생했다. 대선캠프가 미완성 단계라 그렇다는 해명이 뒤따랐다. 그런데 언론이 취재한 바, 도대체 누가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의혹만 커져갔다. 반 기문 캠프가 외교관 집단과 정치인 집단으로 양분됐다는 말도 들렸다. 둘 사이에 조율이 잘 안 된다는 그럴 듯한 분석도 함께 나왔다. 그런데 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불통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내내 소통 부재 논란에 휩싸였다.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도, 각 부처 장관도 대면보고를 하기가 어려웠다. 대면보고를 하더라도 자유롭게 의견 개진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받아쓰기만 했다. 반 전 총장과 참모의 관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 전 총장의 권위에 눌려 어느 누구도 이래라저래라 말할 수 없는 처지였을 테다. 반 전 총장은 그래도 의견을 듣는 편이다. 다만 아랫사람들의 역량이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대한민국 공직사회에서 고위관료는 권한이 막강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 책임질 일이 생기면 아랫사람이 모든 짐을 떠안기 마련이다. 상명하복을 강조하는 조직문화가 갖는 이율배반적 측면이다. 고위 공직자의 책상 위에는 결재함이 놓여 있다. 기결-미결-보류로 분류된 야트막한 함이다. 성격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유독 보류가 많은 사람이 있다. 책임져야 할 사안에 대해서는 사실상 결재를 거부하는 유형의 인물이다.
이 경우 아랫사람은 답답하다. 그래도 함부로 결재를 요구할 수는 없다. 이 또한 성격에 따라 나뉘긴 하지만, 충성심 강한 부하는 대체로 채근하지 않고 기다리는 쪽을 택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류 기간이 길어지면 눈치껏 기각된 것으로 처리한다. 고건 전 총리는 어떤 경우였을까. 과거 고 전 총리의 주변에서는 “고 총리는 2%가 부족하다”는 말이 자주 나오곤 했다. 지나치게 신중한 나머지 결정을 자꾸 미룬다는 지적의 연장선에서 나온 말이다.
고 전 총리는 2007년 대선을 2년여 앞둔 2005년 ‘고건 신드롬’까지 몰고오며 대세론의 주역으로 급부상했다. 반 전 총장처럼 제3지대를 이끌 핵심 인물로 주목받기도 했다. 사실상의 대선캠프였던 ‘미래와 경제’를 기반으로 신당을 창당하고 지지율이 하락세인 집권여당 열린우리당을 해체해 개별 입당으로 세를 불려나갈 방안도 반 전 총장의 계획과 유사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갈등이라는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고건 총리 기용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라고 언급하면서 노골적인 반대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다. 고 전 총리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민주당계 정당 후보는 영남에서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아야 당선될 수 있는데, 호남 출신이라 그런지 여론조사상 영남에서 지지율이 별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아 당선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여 포기했다.’ 노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영남 진보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지적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왜 고 전 총리는 노 전 대통령처럼 하지 못했을까 의문이 든다.
‘노무현에게는 한 방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승부사 기질이 유독 강했다. 그래서 궁지에 몰리기도 했지만, 벼랑 끝에서 살아나오기도 했다. 당시 고 총리는 노 대통령과 담판승부를 펼쳤어야 했다. 하지만 돌파하기보다 수용하고 물러섰다. 반 전 총장의 대선 불출마 선언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한다. 지지율은 일시적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언론이 부정 일변도의 보도를 쏟아낼 때도 많다. 눈치 빠른 정치권 인사들이 안면을 몰수하기도 한다. 그래도 돌파해내는 것이 정치력이다.
반 전 총장은 불출마 선언 이유로 언론과 정치인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언론과 관련해서는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와 각종 가짜뉴스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정치인과 관련해서는 일부의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고위 공직자 출신답게 책임을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긴 것이다. 그런데 언론과 정치인은 극복 대상이자 포섭 대상이지,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은 아니다. 그들은 출마를 강요하지 않았고, 불출마를 강요한 적도 없다.
그래도 고건보다 유리했는데…
반 전 총장은 고 전 총리에 비해 유리한 점이 많았다. 첫째, 집권여당의 지지를 받아왔다. 반 전 총장 스스로 거리를 두긴 했지만, 새누리당은 최근까지도 내심 그가 함께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듯하다. 지지율이 하락세로 돌아서면서 몸값이 다소 떨어지긴 했지만, 반 전 총장의 입당은 새누리당에게 반전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 전 총리는 노 전 대통령은 물론, 열린우리당 주류 세력과도 관계가 좋지 않았다.
둘째, 지역적 기반이 충청도다. 고 전 총리는 호남지역 출신이라는 것이 단점으로 작용했다.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도 결국 호남을 기반으로 한 정권이었기 때문에 또다시 호남 출신 대통령을 낸다는 데 큰 부담이 따랐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도 영남 출신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보수세력은 또다시 영남 출신 대통령을 내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반 전 총장이 유리했던 것이다.
셋째, 신당을 창당하지 않더라도 정당 기반을 가질 수 있는 위치였다. 고 전 총리는 제3지대 신당 창당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은 본인이 마음먹기에 따라 바른정당이나 국민의당으로 갈 수도 있었다. 이 또한 지지율 하락의 영향을 받긴 했겠지만, 그래도 정당 기반을 조기에 획득하는 게 가능한 환경이었다.
그런 점에서 반 전 총장의 불출마 선언은 의외다. 적어도 정치적으로 볼 때는 그렇다. 노 전 대통령도 한때 지지율이 바닥까지 떨어진 적이 있다. 그래도 기사회생했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도 대통령 꿈을 거의 버렸던 적이 있다. 하지만 꿈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 해냈다. 정치인과 공직자의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일까. 태생적으로 다르다기보다 그들의 인생 역정이 유전자에 각기 다른 역량을 새겨 넣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치 역량을 새겨 넣기에 20일이라는 기간은 당연히 너무 짧았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