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해군 버지니아급 핵추진 잠수함. GETTYIMAGES
필리조선소에는 상선 건조 도크뿐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핵연료 공급이 가능하다면 우리 기술로 재래식 무장을 탑재한 잠수함을 여러 척 건조해 한반도 해역을 방어하고 미군의 부담을 줄이겠다”고 제안했다.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을 통해 미국이 농축우라늄 연료를 공급해준다면 잠수함은 우리 스스로 건조하겠다는 뜻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의 핵잠수함 보유를 승인하되, 건조는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문제는 현재 필라델피아에 핵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는 조선소가 없다는 점이다.과거 필라델피아에는 중대형 전투함을 건조하는 미 해군 조선소가 있었다. 그러나 해당 조선소는 1995년 폐쇄됐고, 지금은 미 해군의 퇴역 함정 장기 보관 부두로 사용되고 있다. 이 조선소 부지 가운데 서쪽 일부를 민간 회사가 임차해 중소형 상선 건조용 조선소로 쓰다가 반납했다. 이를 최근 한국 기업 한화가 인수한 게 바로 필리조선소(Philly Shipyard)다. 그런데 이곳에는 상선 건조 도크 2곳만 있을 뿐 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는 시설이 없다. 백악관 보도자료에 따르면 한화는 이곳에 50억 달러(약 7조1500억 원)를 투자해 조선 능력을 10배 넘게 키울 계획이다. 즉 트럼프 대통령의 말은 “한국 너희가 핵잠수함을 원한다면 일단 미국에 핵잠수함 건조 시설부터 만들고, 거기서 핵잠수함을 건조해 가져가라”는 뜻이다.
현재 미국에서 핵잠수함 조선소를 보유한 기업은 제너럴 다이내믹스 일렉트릭 보트(GDEB)와 헌팅턴 잉걸스 인더스트리(HII) 2곳뿐이다. 이들 기업은 존스법(Jones Act) 덕에 오랫동안 미 해군 건함 사업을 독식하면서도 기술개발 및 설비투자에는 소홀했다. 미 국방부와 해군이 수년째 핵잠수함 건조 시설을 확충해달라고 요청했음에도 요지부동이다. 미국은 중국의 급격한 해군력 확장에 맞서 현재 2척 수준인 연평균 핵잠수함 건조 능력을 2배 이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그러려면 GDEB와 HII가 조 단위 투자에 나서야 하지만, 자신의 과점적 지위를 잘 아는 이들 업체는 설비 확충 비용을 정부가 지불해야 한다며 버티고 있다.
전용 도크와 차폐 설비가 완비된 핵잠수함 건조 시설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정부 지출을 줄이려는 트럼프 행정부가 이런 비용을 부담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핵잠수함을 거론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미국에 이익이 되는 기회로 바꿔버린 것이다. 한국 돈으로 미국에 핵잠수함 건조 시설을 짓게 만든 것이니, 그들로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화 필리조선소. 뉴시스
러시아, 인도·북한에 핵잠수함 제공
이제 한국 정부가 핵잠수함 도입을 위해 할 일은 미국과 세부 합의를 도출해 법적 구속력이 있는 문서를 만드는 것이다. 급선무는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이다. 구체적으로 △제7조 핵물질 이전은 원자로 가동·실험 목적의 저농축우라늄(우라늄235 동위원소 20% 미만)에 국한 △제13조 군사적 사용 금지 △제14조 한국의 모든 원자력 활동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 등과 관련된 내용이다. 이들 조항을 고쳐야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고농축우라늄(HEU)을 공급받아 잠수함에 사용하고 이와 관련된 IAEA의 규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한미 원자력협정이 일사천리로 개정된다면 다음 순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잠수함을 만들지 정하는 것이다.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호주처럼 미 해군의 주력 공격원잠인 버지니아급을 필라델피아에서 건조해 도입하는 것이다. 버지니아급은 95% HEU를 연료로 쓴다. 이 정도 HEU는 곧바로 핵탄두 제조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위험 물질이라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라 국가 간 거래가 엄격히 제한된다. 미국은 AUKUS 조약을 통해 이런 제한을 빠져나간 바 있다. NPT 회원국이 핵물질을 무기로 전용하지 않도록 IAEA와 체결하는 ‘전면안전조치협정’의 예외 조항을 활용한 것이다. 해당 협정 제14조에는 “해군 함정 추진용으로 사용되는 비폭발성·군사용 핵물질은 전면안전조치의 예외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미국과 호주는 바로 이 조항을 이용해 95% HEU를 연료로 사용하는 버지니아급 잠수함 거래를 합법화했다.
해당 예외 조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자기들 의지에 따라 핵 확산 통제를 그때그때 조정할 수 있도록 한 장치다. 가령 러시아는 AUKUS 조약이 체결되기 훨씬 전 인도에 공격원잠을 빌려준 바 있다. 최근에는 북한에 잠수함용 원자로와 선체 모듈 일부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가 인도에 빌려준 아쿨라급 공격원잠, 북한에 제공한 것으로 추정되는 델타-IV급 전략원잠 모두 HEU 원자료를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의 대북 핵잠수함 제공을 한국 HEU 핵잠수함 도입의 ‘지렛대’로 삼을 수 있다.
일각에선 저농축우라늄(LEU)을 연료로 쓰는 ‘한국형 핵잠수함’을 독자 설계해 필리조선소에서 건조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하지만 이는 비용·시간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라는 게 필자의 견해다. 이런 핵잠수함을 개발하려면 LEU를 쓰는 잠수함용 원자로를 새로 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이 필리조선소에서 미 해군용 핵잠 건조를 우선시하라고 압박할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필리조선소에서 서로 다른 규격의 핵잠수함을 건조하려면 도크와 작업장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형 핵잠수함이 나온다면 ‘기성품’인 버지니아급과는 달리 완전히 새로 개발한 잠수함일 것이다. 진수 후에도 각종 시험 및 평가에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그만큼 전력화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
韓 핵잠수함, 대잠 임무 우선
호주는 버지니아급 3척 직도입, 독자 모델 공동개발 5척 현지 건조 등 핵잠수함 8척을 도입할 예정이다.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은 2450억 달러(약 349조8800억 원)로, 척당 43조 원 넘는 천문학적 규모다. 물론 이는 원자력 인프라가 없다시피 한 호주 특성상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들고, 신형 잠수함을 공동개발하기로 한 영국의 군함 건조 비용이 터무니없이 비싸진 탓이 크다.호주가 미국에서 직도입하는 버지니아급 3척은 최신 모델인 블록 V가 될 가능성이 크다. 블록 V 가격은 최신 계약 기준으로 1척에 45억 달러(약 6조4400억 원) 정도다. 이는 직전 모델인 블록 IV(18억 달러·약 2조5700억 원)에 비해 2배 이상 비싸진 가격이다. 배수량이 크게 늘고 설계 변경이 많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블록 V는 이전 모델보다 수중 배수량이 3000t가량 늘어난 1만t에 달한다. 노후화된 오하이오급 순항미사일 원잠의 임무를 일부 대체하기 위해 장거리 타격용 미사일 수직발사시스템을 대폭 확충한 결과다. 한국 핵잠수함은 지상 타격보다 적 잠수함 추적·대응 임무가 우선이다. 따라서 블록 V보다 작고 저렴한 블록 IV 모델을 소폭 개량해 도입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척당 3조 원에 육박하는 핵잠수함 가격은 디젤-전기추진 잠수함에 비해 비싸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디젤-전기추진 잠수함은 세계 최정상급 성능을 갖춘 한국 장영실급도 1조 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핵잠수함이 최고급 사양의 재래식 잠수함보다 3배 이상 비싼 셈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현재 보유한 구식이고 기동성이 떨어지는 디젤 잠수함 대신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고 말했다. 장영실급을 위시해 고성능 잠수함들로 무장한 한국 잠수함대를 왜 ‘구식(old fashioned)’이라고 표현했을까.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한국 해군 장영실급 디젤-전기추진 잠수함. 뉴스1
디젤-전기추진 잠수함, 속도 높이면 ‘방전’ 빨라져
현재 한국 해군은 독일 209-1200형 잠수함을 면허생산한 장보고급과 214형을 면허생산한 손원일급 각각 9척, 순수 독자 기술로 설계한 도산안창호급 3척을 보유 중이다. 여기에 더해 최근 장영실급 선도함을 진수했다. 장보고급은 디젤-전기추진 잠수함이고, 손원일급 이후 모든 함종은 공기불요추진(AIP) 시스템을 탑재한 개량형 디젤-전기추진 잠수함이다. 디젤-전기추진 잠수함은 말 그대로 디젤엔진으로 생산한 전기를 배터리에 저장해뒀다가 움직인다. 디젤엔진은 산소가 필요한 내연기관이라서 물속에선 쓸 수 없다. 그래서 디젤-전기추진 잠수함은 수시로 수면 근처로 올라와 ‘굴뚝’을 물 위에 노출해야 한다. 이 상태로 디젤엔진을 돌려 배터리를 충전한 뒤 굴뚝을 접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이 순간이 잠수함이 적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때다.주요 잠수함 제조사들은 자사의 최신 잠수함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50일간 스노클 없이 지속 잠항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최소 동력만 쓰는 ‘절전모드’일 때 얘기다. 배터리 완충 상태에서도 제원상 최대속도로 잠항하면 1~2시간 안에 방전된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필자는 해군과 함께 핵잠수함 연구 사업을 수행했다. 해당 연구에서 “기존 잠수함으로 북한 잠수함 1척을 상시 감시·추적하려면 10척을 전담 전력으로 붙여야 한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온 바 있다. 당시 잠수함의 척당 가격은 4500억 원으로 계산됐다. 몇 년 전 기준이긴 해도 디젤-전기추진 잠수함에 4조5000억 원을 써야 북한 전략잠수함 1척의 위협에 제대로 대비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에 핵잠수함이 필요한 이유다.
미국이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한국은 핵잠수함 도입 첫걸음을 뗄 수 있게 됐다. 최근 북한은 수중 핵미사일 투발 능력을 구축하고 점점 위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신냉전 격화로 한반도 주변 안보 환경이 급속도로 악화되는 상황이다. 한국은 한시라도 빨리 핵잠수함을 손에 넣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