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된 시인 윤동주는 감옥에 갇혀 수학 문제를 푼다. 옥의(獄醫)가 정체불명의 주사를 놓은 뒤 연산을 해보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장면은 일제강점기 윤동주와 같은 감옥에 수감됐던 한 독립운동가의 증언에 근거해 만들어졌다. 1977년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김헌술 씨다. 그는 85년 ‘정경문화’에 다음과 같은 체험을 밝혔다.
‘옥의는 우리에게 암산용지를 2~3장씩 주면서 일정 시간에 암산을 해 연필로 답을 적으라고 했다. 암산용지에는 간단한 가감산 문제가 수백 개가량 나와 있었다. (중략) 주사를 맞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자 암산능력이 거의 반으로 떨어졌다. (중략) 우리는 이것을 생체시험이라 불렀다.’(‘윤동주 평전’에서 재인용)
일제는 이처럼 사람을 대상으로 약물을 시험하며 그 영향을 판정하는 도구로 암산능력을 사용했다. 정답률을 두뇌활동의 ‘출력 값’으로 본 셈이다.
우리는 체험적으로도 수학 문제를 풀 때 뇌가 활발히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다. 연습용으로 초등학교 2학년 대상 문제를 하나 풀어보자. ‘3◯◯-◯◯7-4◯◯-◯57-◯◯◯’에서 빈칸에 들어갈 숫자를 찾는 것이다. 각각의 수는 가장 작은 것부터 70씩 차이가 나게 배열돼 있다. 자, 정답이 보이는가. 동시에 뇌의 구석구석이 자극되는 게 느껴지는가.
알파고를 만든 수학
우리나라에서 수학 공부는 오랫동안 입시 준비생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지독한 대입 터널을 통과하고 나면 수학과 영영 작별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뇌를 좀 더 많이 사용하기 위해, 또는 재미와 기쁨을 얻으려고 다시 수학을 공부하는 어른이 늘고 있는 것이다.
‘소설처럼 아름다운 수학 이야기’를 쓴 소설가 김정희 씨는 “머리가 복잡하거나 무기력증에 빠질 때 수학 문제를 푼다. 그러면 머리가 맑아지고 양치질을 하고 난 것처럼 개운하다”고 밝혔다. 그래서 김씨는 수첩에 수학 문제를 적어두었다가 몸과 마음이 지칠 때 하나씩 풀어본다고 한다.
최근 ‘알파고 대 이세돌’의 바둑대국 이후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수학을 공부하려는 어른이 더욱 늘어나는 추세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취업해 기획부서에서 일하는 직장인 박성재 씨는 “알파고의 알고리듬에 대한 언론기사를 보니 함수, 경우의 수, 확률 등 학창시절 배운 수학 용어가 많이 등장하더라. 인공지능을 현실로 만든 기술의 바탕에 수학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다시 수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비례대표 후보 1번에 박경미 홍익대 수학교육과 교수를 배치한 더불어민주당 김성수 대변인도 그 배경으로 “인공지능의 기본은 수학이란 점을 고려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이미 5~6년 전부터 성인 수학 공부 열풍이 불었다. 그동안 인문 분야 강의가 주류였던 일본 각지 문화센터에서 미분·적분 같은 수학 강좌가 인기를 끌고, ‘다시 하는 고교수학’ ‘수학 걸’ 등의 교양 수학서도 인기를 모았다. 이에 대해 3월 어른을 위한 수학 교재 ‘뇌팔팔요법’을 펴낸 ‘기탄출판’의 주성택 연구위원은 “일본 출판 트렌드가 한국에 들어오는 데 보통 5~10년 걸린다. 최근엔 ‘알파고 현상’도 있어 우리나라 성인의 수학 공부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3월 23일 삼성그룹 사장단이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아주대 석좌교수)을 초청해 ‘산업과 세상을 바꾸는 수학’이라는 제목의 특강을 듣는 등, 사회 각계에서 수학을 배우려는 움직임도 시작되는 분위기다.
과학계는 이처럼 수학이 ‘입시과목’에서 ‘사회적 교양’으로 변화하는 것을 환영한다. ‘과학으로 생각한다’의 저자 이중원 서울시립대 철학과 교수에 따르면 물리학자 뉴턴에게 자연은 ‘수학으로 쓰인 책’이었고, 수학은 ‘자연을 읽는 언어’였다. 따라서 수학을 배우는 것은 세상의 비밀을 풀고 진리를 알아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는 저서 ‘원론’에서 ‘서로 같은 것에 같은 것을 각각 더하면 그 결과는 같다’ 등 5개의 공리와 5개의 공준을 바탕으로 465개 명제를 증명해냈다. 이렇게 기본적인 명제에서 출발해 논리적 방법으로 새로운 명제를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수학이다.
인류는 이 힘을 이용해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왔다. 김민형 영국 옥스퍼드대 수학과 교수의 저서 ‘수학의 수학’을 보면 인류가 수학을 바탕으로 점, 직선, 평면, 시공간을 차례로 이해하며 우주의 비밀을 풀어온 과정을 알게 된다. 전문가들은 성인이 수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면 이처럼 수학 관련 교양서적을 읽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고 권한다. 코딩과 확률, 프랙탈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한 박형주 소장의 ‘수학이 불완전한 세상에 대처하는 방법’을 읽으면 수학이 현대 문명의 최첨단에서 어떤 구실을 하는지 깨닫게 된다. 미국 하버드대와 MIT, 코넬대 등에 재직한 수학자 스티븐 스트로가츠의 저서 ‘X의 즐거움’을 보면 베이글을 어떻게 잘라야 크림치즈를 더 많이 바를 수 있는지 등 생활 속에서 수학을 쉽고 재미있게 활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지겨운 입시 과목 정도로 여겨지던 집합, 확률, 미분, 적분 등의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다.
차근차근 한 걸음씩
김정희 씨는 이처럼 교양서를 읽으며 충분히 ‘워밍업’을 한 뒤 본격적으로 수학 문제를 풀어볼 것을 제안했다. “중학교 수준의 문제집을 한 권 마련해 가장 쉽게 풀 수 있는 지점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올려가다 보면 언젠가는 고3 수준의 문제집도 수월하게 풀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임신 중 태교를 위해 가정으로 배달되는 수학 학습지를 풀었다는 주부 김혜원 씨는 “진도를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니 원리 이해부터 복잡한 계산까지 할 수 있게 돼 좋았다. 수학의 재미에 빠져 출산 후에도 학습지를 계속 했다”고 밝혔다. 교과서 순서에서 벗어나 자신이 좀 더 흥미를 느끼는 분야부터 공부를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돈키호테는 수학 때문에 미쳤다’의 저자 김용관 씨는 “수에 대한 호기심이 큰 사람은 정수론, 논리정연함을 좋아하는 사람은 집합론, 인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수학사가 잘 맞는다”고 조언했다. 성인 수학의 목적은 입시가 아니니 틀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자,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자. 초등학교 2학년생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위 문제의 정답은 347-417-487-557-627이다. 네 번째 칸의 ‘57’에서 세 번째 칸에 들어갈 숫자를 찾아낸 뒤, 규칙에 맞게 적용하면 다른 칸도 모두 채울 수 있다. 이렇게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정답을 찾고, 그 즐거움을 기초 삼아 점점 더 깊고 넓은 곳까지 관심을 뻗어갈 수 있는 게 수학의 매력이다. 여기서 좌절했든, 쾌감을 느꼈든 당신은 이미 수학의 세계에 한 발을 들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