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서는 대구·경북을 TK로 칭한다. YS(김영삼), DJ(김대중), MB(이명박)처럼 유력 정치인 이름에서 영어 이니셜을 따온 경우는 흔하지만, 특정 지역을 이렇게 부른 것은 TK가 처음일 터다. 그만큼 TK란 용어에는 독특한 정치적 함의(含意)가 들어 있다. 멀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서부터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 근년 들어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현 대통령까지 TK는 대한민국 보수정치, 흔히 말하는 산업화세력의 핵심 기지였다.
TK의 중심 도시 대구는 해방 전후 한때 ‘동양의 모스크바’라 불린 적도 있다. 좌파 공산주의 운동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1946년에 있었던 대구 10·1사건은 그런 연장선상이다. 물론 이는 아득한 옛일이 됐다. 한참 뒤인 60년 대구에서 진행된 2·28학생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시민운동은 우파적 근거를 지향했고, 대구의 또 다른 역사적 역동성과 정치적 저력을 알리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구는 2000년대 들어 대한민국 수도권 중심주의에 대항해 일어난 지방분권(分權) 운동의 시발지였다.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어느 지역도 특정 정치이념이나 색깔에 100% 경사되는 곳은 없다. 그런 점에서 대구에서도 여러 갈래의 정치적 의견이 표출된다. 그럼에도 최근 30여 년의 정치적 성향을 놓고 보면 TK는 확실히 보수의 핵이었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TK는 27석 전석을 새누리당이 휩쓸었다. 그해 12월 대통령선거(대선)를 앞둔 박근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이 전면에 나선 결과라 해도 무방하다. 어쩌면 조그마한 국가를 형성할 500만 인구의 지역에서 특정 당이 전석을 휩쓴다는 것은 정치적 성향이 확고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를 비판하는 한쪽에서는 ‘골수 보수 TK’라고 폄훼한다. 대구의 보수 인사들은 이 같은 폄훼가 굉장히 부당하고 근거 없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묵묵히 대한민국을 지탱하고, 오늘의 번영을 누리는 기관차 노릇을 한 근대화세력의 기지, 대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응수다.
이 같은 논쟁의 옳고 그름은 접어두고 4·13 총선을 앞두고 TK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TK의 현재는 새로운 정치적 변화의 변곡점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정치적 다양성’의 기운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TK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4·13 20대 총선을 앞두고 TK는 전국적인 관심 지역이 됐다. 유례가 드문 일이다. 따지고 보면 이는 지난해 6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석상 발언에서 시작됐다. 이른바 ‘배신의 정치’ ‘자기 정치’를 국민이 심판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자기 정치의 당사자는 누가 봐도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대구 동구을)였다. 버티던 유 의원은 보름 뒤 원내대표직을 사퇴했다.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하는 헌법 제1조를 낭독했고, 저항의 메시지를 남겼다.
그 여진은 결국 새누리당의 공천 파동으로 연결됐다. 총선 후보 등록일 하루 전까지 진행된 새누리당의 공천 전쟁은 사실 유승민으로부터 시작돼 유승민으로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구시민은 혼돈에 빠졌다. 대구에서 배출된 대통령과 여당 원내대표의 격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라는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내부 혼돈은 차치하더라도 외부의 집중된 시선은 대구 여론을 더욱 들끓게 한다.
TK를 바라보는 2개의 시선
현재 대구 여론에는 두 가지 큰 축이 있다. 하나는 ‘보수의 심장 대구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드디어 대구가 변한다’는 정치적 기대감이다. 서울에 사는 TK 출신 모 인사는 기자에게 이렇게 전했다.“아니, 대구가 어떤 곳인데.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보수의 근원이지 않은가. 여기서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린다. 정말 중심을 잡아야 한다.”
또 다른 인사는 정반대 시각을 표명했다.
“드디어 대구가 변하고 있구나. 대구가 변하면 대한민국이 변할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는 달라진 모습으로 대한민국 정치1번지의 영광을 복원해보자.”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는 TK에서 이른바 ‘8080’ 목표를 달성했다. 80% 투표율에 80% 득표율이다. 절대적 지지였다. TK에서 박 후보는 202만 표차를 냈다. 문재인 후보와의 전국 격차 108만 표의 2배에 가깝다. TK의 확고한 지지가 대권 승리의 디딤돌이었다.
1월 20일 대구에는 눈에 띄는 캐치프레이즈로 주목받은 6인 연대가 등장했다. 이른바 ‘진박(眞朴)연대’였다. ‘진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이란 뜻이었다. 박 대통령은 앞서 ‘진실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문한 상태였다. 6인 연대의 특정 후보는 심지어 “진박으로 명(命)받았다”는 표현을 썼다. ‘진박 감별사’까지 등장해 무형의 ‘진박 인증마크’를 부여하는 진풍경이 전개됐다.
지난 대선에서의 지지로 보면 진박 전략은 무서운 힘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결과적으로 그 마케팅은 실패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현역의원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물론, 기존 제3후보에게도 뒤처지는 상황이 속출했다. 6인 가운데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동구갑), 추경호 전 국무조정실장(달성군)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이른바 ‘옥새투쟁’까지 가는 파란 끝에 후보 등록 하루 전에야 겨우 공천장을 거머쥐었다. 그것도 단수추천 방식이었다. 중·남구 곽상도 전 대통령비서실민정수석비서관만 경선을 통과했다. 나머지 윤두현 전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서구)과 하춘수 전 대구은행장(북구갑)은 경선에서 패했다. 유승민 의원이 버티는 문제의 동구을은 이재만 전 대구 동구청장이 진박 타이틀로 도전했지만, 일대 공천 파동을 겪으며 결국 무공천으로 결론났다.
진박 마케팅은 박 대통령에 대한 국정 지지율이 여전히 60~70%인 상황에서도 먹혀들지 않았다. 민심을 잘못 읽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여론분석가들은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와 총선 후보에 대한 그것을 대구시민들은 일정 부분 구분하는데, 이를 완전히 동일시해 너무 쉽게 접근한 것이 화근이었다”고 진단했다. 물론 여기에는 이른바 유승민 의원을 둘러싼 사생결단의 공천 파동이 자리한다.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공천 전쟁의 시작은 유승민, 마무리도 유승민이었다. 유 의원은 3월 23일 밤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자신을 둘러싼 공천 전쟁이 탈당 시한 마지막 날 밤까지 미뤄지자 퇴로가 없다고 판단,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결행한다. 그는 인상적인 기자회견문을 준비했다. 유 의원은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늘 고민했다”고 전제하면서 포문을 열었다.
유승민 흰옷 입다
그는 “공천과 관련해 당이 보여준 것은 정의가 아니다. 민주주의가 아니다. 상식과 정의가 아니다”라며 “이는 부끄러운 정치 보복으로, 나는 정의가 짓밟힌 데 대해 분노한다”고 했다. 특히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회가 유 의원의 적격 여부를 논의하며 거론한 당의 정체성 부합 문제를 정면 반박했다.
“국회 원내대표 연설을 다시 읽어봤다. 몇 번을 읽어봐도 당의 정강정책에 어긋난 것이 없었다.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 추구가 나의 정책이 옳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어 그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헌법 제1조 2항이다. 어떤 권력도 국민을 이길 수 없다. 권력이 나를 버려도 나는 국민만 보고 나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정면 돌파인 셈이다. 유 의원의 정면승부는 하룻밤 만에 이상한 결론으로 귀착됐다. 김무성 대표가 동구을 무공천을 목표로 ‘옥새투쟁’을 시작해 관철한 것이다. 이로써 무소속 유 의원과 새누리당 이재만 후보의 격돌은 무산됐다. 김 대표는 “당을 억울하게 떠난 동지가 남긴 ‘정의가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니다’라는 말이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면서 유 의원의 탈당선언문을 인용했다.
결과적으로 친박(친박근혜)계의 척결 1순위인 유 의원은 20대 국회 무혈입성이 유력해졌다. 반면 기권승을 받은 유 의원이 오히려 이번 총선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는 분석도 나왔다. 김무성 대표가 ‘신의 한 수’로 마치 유 의원을 살린 듯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분석이다. 유 의원으로서는 내심 바라던 일대 격전의 기회를 잃은 셈이다.
유 의원은 그 대신 이른바 ‘흰옷 연대’로 눈을 돌렸다. 그는 “억울하게 경선 기회조차 박탈당한 동지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면서 “나를 돕다 피해를 입은 의원들을 돕겠다”고 했다. 인접 지역구인 동구갑 류성걸 의원과 북구갑 권은희 의원이다. 동구갑은 정종섭 전 장관이 출마한 곳이다. 유승민, 류성걸, 정종섭은 경북고 57회 동기다.
유 의원은 류성걸, 권은희 의원과 나란히 후보 등록을 했다. 그들은 똑같이 흰옷을 입었다. 동화사 모임에도 같이하는 등 이른바 느슨한 연대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이들 의원의 생환 여부가 유승민 파워의 크기를 가늠하는 척도다. 유 의원 측도 최소 동구갑 정도에서는 당선해야 정치적 승리로 생각하는 듯하다. 주목되는 것은 유 의원의 캐치프레이즈다. 그는 ‘대구의 아들’ ‘대구의 힘’을 내걸었다. 그의 진정한 승부는 총선 이후 새누리당 당권경쟁 무대가 될 것이 틀림없다.
유 의원 및 배신의 정치 논란과 함께 대구의 정치적 변화에 대한 관심은 일찌감치 대구 수성갑으로 모아졌다. 경기도지사를 역임한 김문수 전 지사와 더불어민주당(더민주당)의 3선 의원 출신인 김부겸 전 의원의 빅매치 때문이다. 대구는 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 중·서구에서 36%(12만1000표) 득표율로 1위로 당선(당시는 중선거구제)한 유성환 전 의원(신민당) 이래 진정한 야권후보가 배출되지 못했다. 96년 박철언 전 정무제1장관을 비롯한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이 대구를 휩쓸었지만, 이들 세력은 어디까지나 당시 여권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였다.
김문수, 김부겸은 여야 각 진영에서 대권후보, 이른바 잠룡이란 측면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곳 승부가 대구 정치지형의 변화를 가져올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지난 총선에서는 TK 27개 의석(이번에는 25석)을 새누리당이 모조리 휩쓸었다. 이른바 27 대 0이다. 수성갑은 김부겸 전 의원이 선점했다. 그는 2012년 총선에서 이한구 의원과 맞붙어 대구에서는 이례적으로 40% 득표율을 올렸다. 2014년 대구시장 선거에도 출마해 40%를 넘겼다. 이미 40% 수준의 고정 지지층을 형성한 상태다.
이 바람에 뒤늦게 뛰어든 김문수 전 지사는 여론조사에서 고전하고 있다. 대체로 10% 안팎의 격차를 보인다. 일부 조사에서는 거의 동률로 나오기도 했지만, 확실히 이긴다는 조사는 없다. 김 전 지사 측은 “보수의 아성 대구가 야권에 의석을 내준다면 대한민국이 위태롭다”고 주장한다. 지원에 나선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도 “대구는 보수정권, 새누리당 정권의 심장이다. 대구가 흔들리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도 흔들린다”고 말한다. 반면 김부겸 전 의원 측은 “대구도 이제 변해야 한다. 대구도 야권에 의석을 줘야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지난 수십 년간 일편단심 한쪽을 밀어준 결과가 무엇이냐”고 반문하고 있다. 대구는 1인당 총생산이 20여 년 이상 전국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꼴찌다.
“이제 대구를 바꿉시다”
4·13 총선 공식 선거운동을 하루 앞둔 3월 30일 대구에서는 눈길 가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대구를 대표하는 각계 인사가 4·13 총선을 앞두고 대구의 변화를 호소한 것이다. ‘대구의 앞날을 걱정하는 각계인사 1033인 일동’은 이날 경북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제, 대구를 바꿉시다’란 제목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대구지역 학계, 종교계, 법조계, 언론계, 의료계, 문화·예술계, 교육계, 경제계 등 1033명 인사가 서명했다. 규모에서도 과거와 다른 모임이었다.
이들은 “대구 위상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서울, 부산과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인천한테도 밀린다. 1인당 지역총생산이 20여 년 동안 전국 꼴찌고 청년층의 지역 유출은 전국에서 가장 높다”면서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중앙집권-수도권 중심의 발전체제 때문이지만, 특정 정당이 장기간 독차지해온 대구 정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30여 년간 대구가 한 정당만 밀어줘 얻은 게 무엇이냐”고 반문하면서 “지금의 대구는 고인 물과 같다. 여야의원들이 비전과 정책을 앞다퉈 마련하고, 경쟁과 협력을 통해 대구 발전에 헌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구의 정치적 다양성을 주창한 것이다.
모임을 주도한 김형기 경북대 교수는 “대구의 상대적인 정체는 정치적 획일성이 지난 30년간 우리를 지배한 까닭”이라며 “대구도 이제 4·13 총선을 계기로 좀 더 전략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여야 공존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의미다. 김 교수는 “여야 공존은 바로 대구 캐치프레이즈인 ‘컬러풀 대구’의 정치적 완성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사실 이런 부류의 주장이나 호소문은 과거 선거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제기됐다. 다만 분명한 것은 새누리당의 공천 파동과 배신의 정치 논란을 거치면서 이번만은 다소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는 점이다. 이들 지역 인사의 바람이 지식인의 메아리 없는 한탄이 될지, 대중의 울림이 될지 4·13 총선 결과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 실마리가 엿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