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원래 예산 제약이 심한 곳이다. 사소한 집기 하나 구매한 기록도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시시콜콜 따진다. 업무 추진을 위한 식대조차 제대로 결제하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도 초기에는 그랬지만, 정권 후반기 접어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꼼꼼한 영수증 처리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비공개 활동비가 갑자기 늘어난 것이다. 누구도 출처를 따져 묻진 않았지만, 국회나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국가정보원의 특수활동비를 끌어다 쓴 것이라는 게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명박 정부 핵심에서 일했던 한 인사의 회고다. 박근혜 정부 관계자들이 주문처럼 반복하는 ‘원세훈 국정원장 시절의 구습(舊習)’일 따름일까. 몇몇 전직 안보당국자는 현 정부의 주요 인사 일부도 비슷한 인식을 공공연히 내비친 적이 있다고 말한다. 방대한 규모의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정권의 쌈짓돈’ 정도로 생각하고, 이를 자유자재로 꺼내 쓰기 위한 관건으로 예산 운용의 키를 쥐고 있는 국정원 기획조정실장 자리를 지목하더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국정원 예산을 청와대가 끌어다 쓰는 데도 다양한 통제장치가 있지만, 최소한 정권 핵심 일각의 인식은 그토록 단순하더라는 이야기다.
‘돈 문제’를 둘러싼 정권과 정보기관 사이의 이렇듯 내밀한 속살은, 지난 수개월 사이 국정원 주변에서 벌어진 인사 관련 불협화음의 진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민감한 키워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보기관을 권력 일부로 보느냐, 안보를 담당한 국가기구로 보느냐의 인식 차이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016년도 예산안에 편성된 국정원 특수활동비 예산은 4862억8900만 원. 그리고 그 중심에 국정원 기조실장이 있다.
설 연휴를 앞둔 2월 5일, 뜻밖의 소식이 청와대발(發)로 타전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5일 차관급인 국가정보원 1차장에 김진섭 청와대 국가안보실 정보융합비서관을, 2차장에 최윤수 부산고등검찰청 차장검사를 내정했다는 발표.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가 임박한 시점에 그 주무부처 가운데 하나인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수뇌부를 교체한다는 소식은 다양한 궁금증을 낳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그간 북한과 해외파트를 담당해온 국정원 1차장은 현안의 핵심 담당자 중 한 명이었다.
또 한 가지 의문스러운 대목은 발표 방식이었다. 이날 청와대는 1·2차장 교체로 인사가 마무리된 것인지, 3차장과 기조실장을 포함한 추가 인사가 있을지 명확히 답하지 못했다. 결국 설 연휴 중이던 2월 9일, 청와대는 3차장에 최종일 주레바논 대사를 임명했다고 발표한다. 왜 3차장만 뒤늦게 발표한 것인지에 대한 부연설명은 없었다.
“기조실장 지키고 2차장 내준 격”
기억해둘 것은 이번 인사에 이례적일 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국정원 차장급 간부들이 일괄 교체될 것이라는 소문은 이미 지난해 가을부터 안보당국 주변에 파다했기 때문이다. 정부 안팎의 관련 인물군에 대한 하마평도 끊이지 않았다. 곧 단행될 것이라던 인사가 3개월 이상 지연된 셈. 당초 소식은 2014년 임명된 김수민 전 2차장을 제외하고 박근혜 정부 임기 초부터 자리를 지켜온 1·3차장과 기조실장이 교체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지만, 결국 이번 인사를 통해 이헌수 기조실장은 원장과 차장을 포함한 수뇌부 가운데 3년 이상 자리를 지키는 유일한 구성원으로 남게 됐다.인사를 둘러싼 설왕설래는 지난해 10월과 11월 이병호 국정원장이 국회 정보위원회 회의를 통해 사실상 공공연하게 ‘불만’을 표출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이 국정원장으로 재임 중이던 2014년 여름 벌어진 ‘1차 인사파동’에 이어, 이번에도 청와대와 원장의 뜻이 충돌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 배경이었다. 예정된 차장 인사를 앞두고 청와대 일부 인사가 자신들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C모 국장을 기조실장으로 임명해 승진 대상에 포함시키려 했으나, 원장의 반대에 부딪혀 단행이 늦어지고 있다는 게 그 골자였다(‘주간동아’ 1016호 ‘국정원장은 3인방과 전쟁 중?’ 참조).
공교롭게도 당시 논란의 핵심이던 자리가 바로 국정원 예산과 조직을 책임지는 기조실장이었다. 이헌수 실장은 2014년 이른바 ‘정윤회 파동’ 와중에 청와대로부터 ‘조응천 라인’으로 분류돼 사의를 표명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바 있다. 요컨대 이 자리에 ‘믿을 만한 사람’을 앉혀야 한다는 청와대 일각의 생각과 이를 좌시할 수 없다는 이병호 원장의 반대가 불협화음을 빚고 있다는 게 국회 정보위원회와 안보당국 주변의 대체적인 시각이었다.
뚜껑이 열린 지금 복기해보면, 이러한 견해 차이는 타협안으로 마무리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귀추가 주목되던 기조실장은 유임됐지만, 국내파트를 관장하는 최윤수 신임 2차장이 우병우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의 오랜 친구라는 사실이 입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최 차장은 우 수석의 서울대 법대 84학번 동기로, 지난해 1월 우 수석이 지금의 자리에 오른 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3차장으로 승진해 포스코 비리 등 이른바 ‘청와대 하명수사’로 알려진 사건을 맡아왔다.
국정원 2차장은 주로 공안 담당이 임명되던 자리지만, 최 차장은 오히려 ‘특수통’에 가까운 경력. 1967년생으로 아직 40대인 나이 역시 이례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국정원 주변에서 “실국장급보다 젊은 것은 물론, 3급 직원들과도 나이가 겹친다”는 뒷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를테면 기조실장은 원장의 뜻과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 당
초 생각을 접었지만, 그 대신 국내파트를 담당하는 2차장은 ‘청와대가 신뢰할 수 있는 인물’로 교체한 셈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공직사회의 부조리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준비조치지만, 부정적으로 보자면 국내 현안에 대한 국정원의 활동 폭을 키우려는 의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의 2차장 임명을 둘러싸고 언론에서 반복적으로 비판을 제기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박근혜 정부의 ‘창업공신’과는 거리가 먼 이병호 원장이 이렇듯 뚝심을 발휘하는 배경에는 전임 원장이기도 한 이병기 비서실장과의 이심전심이 있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앞서 설명한 지난해 가을 국회 정보위원회에서의 공공연한 반발 역시 이 실장이라는 ‘믿는 구석’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라는 것. 군인 출신으로 정보기관 경력이 전부인 이병호 원장과 달리 여의도 경험이 만만치 않은 이병기 실장의 노련함이 타협안을 만들어낸 배후의 힘으로 작동한 모양새다.
국정원 기조실장 자리를 둘러싸고 이렇듯 논란이 이어지는 이유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앞서 설명한 국정원 특수활동비 문제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민감한 쟁점에 속한다. 이 문제가 아니라면 반복되는 논란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 한마디로 국정원 예산에 ‘눈독을 들이는’ 정권 핵심 일부와 이에 저항하는 이병호 원장이라는 구도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취임 이후 “정보기관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겠다”는 지론을 되풀이해온 이 원장에 대해 직원들의 평가가 나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이번 인사에 대해서도 국정원 주변에서는 “그만하면 원장이 선방한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결국은 원장 본인?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최종일 신임 3차장이 담당 업무인 사이버·산업보안과는 거리가 먼 경력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전임자인 김규석 전 3차장은 같은 군 출신이긴 해도 통신장교 출신이었으나, 야전과 작전 분야에서 주로 일한 최 차장은 기술 분야와는 사실상 무관하다. 이는 이병호 원장이 해외·북한-국내-사이버·산업으로 나뉘어 있는 1·2·3차장 사이의 현재 업무 분장을, 이명박 정부 이전인 북한-국내-해외 체제로 복원하거나 정보 분석-국내-공작 체제로 탈바꿈하려는 복안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어지는 실국장급 인사를 통해 분명해지겠지만, 어느 경우든 조직 전체를 갈아엎는 개편이 불가피한 매머드급 사안이다.다만 국정원 내부 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잡음이 이번 인사로 종결된 것은 아니라는 게 안보당국 주변의 대체적인 평가다. 당장 인사 발표 과정에서 드러난 혼선은 기조실장을 둘러싼 알력이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단초라는 것. 이헌수 실장의 임기가 이미 3년을 넘기고 있는 만큼 언제든 인사 대상에 포함될 수 있고, 더욱이 북한 핵 정국 와중에 국정원의 정보 능력이 도마에 오른 지금으로서는 이 원장 본인 역시 언제든 교체할 명분이 축적된 상태다. 인사 문제를 둘러싼 불협화음이 결국은 원장 본인을 겨누는 파국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뜻. 아직 비등점에 이르지 않았을 따름이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