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경을 넘어온 쿠바인들이 미국 애리조나주 유마 인근에서 불을 쬐고 있다. [Anadolu]
카스트로 전 총서기는 또 1994년 8월 반정부 시위가 격화하자 국민에게 “원하는 사람은 쿠바를 떠나라”면서 국경을 개방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후 5주 만에 쿠바인 3만5000여 명이 얼기설기 만든 뗏목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를 ‘뗏목 탈출(Raft Exodus)’이라고 부른다.
1959년 공산혁명 이후 최대 규모 탈출
쿠바 국민들이 수도 아바나 한 상점 앞에서 식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DW]
쿠바인이 대규모 탈출을 감행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심각한 경제난 때문이다. 관광업은 쿠바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10%를 차지한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최대 산업인 관광업이 침체에 빠져들면서 쿠바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코로나19 사태가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매년 400만여 명 관광객이 쿠바를 찾았지만 지난해에는 57만여 명으로 급감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제재 등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쿠바 경제상황이 더욱 악화했다. 쿠바 정부에 따르면 전체 노동자의 13%인 60만 명이 민간 부문에 몸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호텔, 식당, 택시 등 관광업종에 종사하는데 코로나19 사태 이후 대거 실업자로 전락했다.
게다가 쿠바의 주요 수출품인 설탕 생산마저 크게 줄어들었다. 설탕은 그동안 쿠바 외화벌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현재는 생산량이 연간 60만~70만t밖에 되지 않아 국내 수요도 충당하기 어려워 오히려 수입을 해야 하는 실정이다. 쿠바는 2021~2022년 설탕 생산량이 부족해 수출을 하지 못했고, 2022~2023년에는 수출 자체를 아예 계획에서 제외했다. 그 이유는 설탕 원료인 사탕수수 농사가 가뭄과 비료 부족 등으로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사탕수수 파종 규모는 예년의 절반에도 못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국가 경제를 이끌어오던 설탕산업은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쿠바의 지난해 GDP 성장률은 -11%로 30년 만에 최악을 기록했다.
경제가 이처럼 악화하면서 국민은 식량과 의약품, 연료 부족 및 정전 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쿠바는 현재 식료품이 부족해 가격이 폭등하고 있고, 약국에는 동트기 전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는 상황이다. 또 베네수엘라가 지원해주던 석유 공급이 대폭 줄어 정전도 시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수백만 가구가 매일 몇 시간씩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난이 심화하자 지난해 7월 쿠바 40여 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쿠바에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것은 1959년 공산혁명 이후 처음이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 겸 공산당 총서기는 “미국 마이애미에 사는 쿠바계 미국인들이 시위를 선동했다”며 강경 진압을 지시했다. 쿠바 사법당국은 시위에 참가한 1500여 명을 체포해 최고 25년 징역형을 선고하는 등 강력히 처벌했다.
경제회복 장기 잠재력 붕괴 전망
쿠바인들이 1980년 ‘마리엘 보트리프트’ 당시 보트를 타고 쿠바를 탈출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그런데 최근에는 이 해상 탈출 루트보다 안전한 육상 루트를 이용해 미국으로 가고 있다. 쿠바의 우방국인 니카라과가 지난해 11월부터 쿠바인에게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인은 항공편으로 니카라과로 간 다음 육로를 이용해 멕시코로 이동하고 밀입국 조직 등을 통해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탈출하고 있다.
특히 이번 엑소더스 사태에서 주목할 점은 탈출하는 쿠바인이 과거에는 미국에 가족이 있는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젊은 층이라는 것이다. 미국 세관국경보호국은 탈출한 쿠바인의 77%가 개인이며, 이들은 대부분 기술을 보유한 고학력 젊은 층이라고 밝혔다. 쿠바 젊은이들이 더는 국가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 고국을 등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쿠바는 2018년부터 이미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인 데다, 향후 급격한 노령화가 진행될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젊은 층의 대거 탈출은 국가 전체에 상당한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쿠바 전체 인구의 21%가 65세 이상이고, 2030년에는 30%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향후 쿠바는 경제상황이 개선되더라도 실질적인 생산성 향상을 통해 경제성장을 주도해야 할 주력 인구층이 유출됨에 따라 경제회복의 장기적 잠재력이 붕괴되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오마르 에버레니 아바나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번 탈출 러시가 쿠바 경제에 장기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이라면서 “국가 미래가 이번 탈출 러시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 같은 대규모 탈출은 더 큰 정치적·사회적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결국 쿠바는 자칫하면 노인만 남는 나라가 될 수도 있다. 또 미국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평균 기대수명이 78세로 비교적 높은 쿠바에서 젊은 고학력 노동층이 대거 떠나고 있어 이 나라에 암울한 인구학적 미래를 예고한다”고 지적했다. 캐트린 핸싱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는 “집계된 탈출자 수에 세르비아 등 다른 나라로 떠난 수천 명은 포함되지 않았다”면서 “이는 쿠바 공산혁명 이후 최대 양적·질적 두뇌 유출”이라고 분석했다.
쿠바 정부는 이번 대탈출 사태에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쿠바 정부는 내년부터 경제상황이 좋아질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를 믿는 국민은 거의 없다. 쿠바 정부는 1968년 모든 기업을 국유화한 이후 처음으로 수천 개 중소기업의 민영화를 허용하는 등 시장경제 정책을 적극 추진 중이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우방 러·중에도 쿠바는 ‘밑 빠진 독’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 겸 공산당 총서기는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보이는 가운데 에너지 위기까지 심화하자 최근 러시아와 중국을 방문해 지원을 호소했다. 디아스카넬 대통령은 11월 23일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양국 협력 관계를 강화하기로 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어 지원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또 디아스카넬 대통령은 11월 25일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을 갖고 차관 등을 요청했다. 하지만 중국은 쿠바에 식료품 구입 등에 쓸 1억 달러(약 1287억 원)를 ‘기부’한다고 했을 뿐, 과거와 달리 통 큰 지원은 약속하지 않았다. 쿠바의 대외부채는 190억 달러(약 24조4500억 원)에 달하는데 이 중 상당액은 중국에 진 빚이다. 중국도 ‘밑 빠진 독’ 신세인 쿠바에 대규모 차관을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쿠바 정부는 ‘최후 수단’으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양국은 최근 협상을 통해 미국 정부는 내년부터 자국 내 쿠바인의 송금액 제한을 없애기로 하고, 쿠바 정부도 쿠바에서 추방돼 미국에 살고 있는 쿠바인이 항공편으로 쿠바를 방문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런 합의는 쿠바 경제를 회복시키는 근본 대책이 아닌 만큼, 쿠바인의 탈출 행렬을 줄이는 데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