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디펜스가 ‘유로사토리 2022’에서 선보인 K9A2 자주포 모형. [사진 제공 · 한화디펜스]
소련 작전기동군의 그림자
이는 곧 소련군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전시킨 군사 전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화력 투사에 대한 미군과 소련군의 인식은 전혀 달랐다. 압도적 공군력을 보유한 미군은 언제 어디서든 무전기로 부르면 아군 전투기가 잽싸게 날아와 적진을 초토화한다는 경험과 믿음이 있었다. 반면 공군력이 취약한 소련군은 어떻게든 지상군의 힘으로 적과 싸워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소련군 역시 항공폭탄 한 발이 수십 문의 야포가 날린 포탄보다 정확하고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공군을 믿지 못한 이유는 필요할 때 반드시 그들이 와준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탈린도 참모들과 회의에서 “항공기는 기상 영향을 크게 받지만 포병은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필요할 때 적재적소에 화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이런 배경하에서 냉전 시절 소련군은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연합군을 제압하고자 ‘작전기동군’(Operational Maneuver Group·OMG)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OMG 작전 수행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포병이다. 나토군 방어선 돌파는 기갑부대가 하지만, 포병과 대전차화기로 중무장한 적 방어선을 무력화해 기갑부대가 돌파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은 포병이기 때문이다. 이에 소련군은 각 제대에 촘촘하게 포병을 배치해 기동부대와 한 몸처럼 움직이게 했다. 기동부대가 필요할 때 즉각 화력을 지원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발전시킨 것이다.
㈜한화가 개발한 K239 천무 다연장로켓. [동아DB]
당연히 나토도 소련군 포병 전력에 대응한 무기체계와 전술을 개발했다. 효과적 대응책이 나왔을 무렵 소련이 붕괴하면서 창과 방패의 싸움은 끝나는 듯 보였다.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는 포병 자산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작전 개념과 전술에도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걸프전 이후 서방 세계에 이른바 ‘군사혁신’(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RMA)이 유행하면서 군 구조와 전술, 작전 개념 전반이 대대적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소련 시대 유산을 유지하기 급급해 새로운 포병무기나 전술 개발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구식 포병 전력
이 때문에 현재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 포병 전력의 90% 이상은 소련 시절 생산된 구식이다. 러시아군에 맞선 우크라이나군의 상황은 더 나빴다. 우크라이나군 포병 자산은 모두 소련 시절 생산된 모델이다. 소련 붕괴 이후 30여 년간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장비가 대부분이라 우크라이나군 포병은 전쟁 초반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쫓겨 다니기 바빴다. 그 탓에 러시아군은 30~40년 넘은 낡은 곡사포와 다연장로켓으로도 충분히 우크라이나군을 몰아세울 수 있었다.폴란드가 한국 K9 자주포 차체에 영국제 포탑을 결합해 만든 자주포 ‘크랩’. [사진 제공 · 폴란드 HSW]
그러나 크랩 자주포는 달랐다. 이 자주포는 고속으로 달리다 무선으로 사격 명령을 받으면 즉시 정차해 자동으로 사격제원을 계산하고 방열한다. 장전장치도 반(半)자동화돼 정차 후 초탄 발사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1분 미만이다. 급속사격하면 1분에 포탄을 최대 6발 퍼부을 수도 있다. 사격 임무가 끝나면 곧바로 급가속해 도망갈 수 있기에 적의 대포병 사격에 당할 위험도 적다. 심지어 사거리도 러시아군 자주포보다 훨씬 길다. 적 포병 사정권 밖 안전한 곳에서 포탄을 쏘고 도망가기를 반복하는 이른바 슛 앤드 스쿠트(Shoot & Scoot) 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 크랩이 배치된 6월 초부터 돈바스 전선에서 러시아군 포병 피해는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강철비가 진지 초토화”
미국의 M142 ‘하이마스’ 다연장로켓. [뉴시스]
여기서 발사되는 227㎜ 로켓 사거리는 구형탄은 32㎞, 개량형탄은 45㎞다. GPS(위성항법시스템) 유도 기능이 추가된 GMLRS 계열탄은 70~90㎞, 최신 GMLRS-ER 버전은 150㎞까지 초정밀 타격이 가능하다. GMLRS 로켓탄 1발엔 적 병사뿐 아니라 장갑차도 파괴할 수 있는 이중목적고폭탄 M85 자탄이 404발 탑재된다. 걸프전 당시 GMLRS 공격을 당한 이라크군 부상병 포로들은 “하늘에서 강철비가 내려와 진지를 초토화했다”며 두려워했다. 하이마스 역시 러시아군 포병의 사정권 밖에서 일반 자주포보다 훨씬 강력하고 정밀한 로켓탄을 퍼붓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러시아군 처지에서 우크라이나군이 크랩이나 하이마스로 구사하는 전술과 능력은 경험해보지 못한 충격일 것이다. 러시아군 포병은 느릿느릿 움직이다 사격 명령이 내려오면 빨라야 10분 후에나 사정거리 10~30㎞에 초탄을 쏘는 존재다. 반면 우크라이나군이 지원받은 서방제 무기는 냉전 말 소련 포병을 제압하고자 만들어져 엄청난 기동성과 화력, 정밀도를 갖췄다.
우리는 걸프전 당시 인상적 활약을 보인 패트리엇 미사일이나 M1 에이브럼스 전차, MLRS 등이 종전 후 세계 방산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린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현재 크랩과 하이마스 등 무기들의 활약상에 구매 의사를 타진하는 국가가 점점 늘고 있다. 한국은 이보다 성능은 우수하면서 가격 경쟁력까지 갖춘 제품군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생산 중인 K9A1 자주포는 화력과 방어력, 기동력 모든 면에서 크랩을 능가하는 현존 최강 자주포다. 그 개량형 K9A2 개발이 현재 마무리 단계로, 영국 자주포 획득 사업에 도전장을 냈다. 완전 자동화된 무인 포탑을 적용해 사거리, 발사 속도, 정밀도 등에서 세계 최정상급 성능을 갖출 예정이다. 2분 안에 최대 54㎞ 거리 표적에 포탄 10발을 퍼부을 수 있어 크랩보다 한 수 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