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훈련에 나선 육군의 K2 흑표 전차. [동아DB]
모래주머니 매단 러 전차
‘슬랫 아머’(철망형 장갑)를 부착한 러시아군 전차. [뉴시스]
전차와 장갑차 등 기갑부대 위주로 편성된 러시아 침공군과 달리 우크라이나군은 보병 중심이다. 오랜 정치적 혼란과 경제난을 겪은 우크라이나는 독립 후 30년 가까이 군사력 현대화가 사실상 멈췄다. 그 때문에 개전 직후 전선에 투입할 수 있는 전차와 장갑차가 그리 많지 않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후 사흘이면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러시아군은 개전과 동시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요 도로를 따라 무작정 돌격해 하루에 수십㎞를 진격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속전속결 전략은 완전히 빗나갔다. 우크라이나는 드넓은 평원에서 전면전 대신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한 소모전을 펼쳤다. 러시아군이 국경을 넘고서도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우크라이나 영토 깊숙이 진입한 것은 우크라이나군이 교전을 피하고 유격전 수행을 위한 거점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군은 상대방이 전의를 잃고 도주했다고 오판해 우크라이나 영토 더 깊숙이 들어갔다. 이윽고 길어진 러시아군 보급선을 여기저기 숨어 있던 우크라이나군이 튀어나와 공격했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러시아군은 대대전술단이라는 소규모 제대 단위로 움직였다. 부대 규모가 작아 기동성이 뛰어나지만 독자적으로 장기 작전을 수행할 능력은 떨어진다. 우크라이나군은 자국 영토 곳곳에 고립된 러시아군 기갑부대를 엄청난 양의 대전차 무기로 격파했다.
러시아 기갑부대 각개격파
우크라이나는 옛 소련 시절 생산된 RPG-7·16·18·22·26·29 대전차 로켓을 추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이 보유하고 있다. RK-3, 스키프(Skif), 배리어(Barrier) 등 다양한 대전차 미사일도 자력 생산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 영토에 있는 러시아 탱크 대당 10개의 대전차 무기 시스템이 곧 우크라이나에 도착할 것”이라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말대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우크라이나에 수많은 대전차 무기를 추가 공급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지원받은 대전차 무기는 종류도 다양하다. 스웨덴제 AT-4 대전차 로켓과 칼 구스타프 무반동총, NLAW 대전차 미사일, 미국제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과 M72 대전차 로켓, 독일제 판저파우스트3 대전차 로켓과 마타도어 대전차 무반동총, 프랑스제 밀란 대전차 미사일과 아필라스 대전차 무반동총, 스페인제 C90-CR 대전차 로켓 등이 대표적이다.우크라이나군은 넘쳐나는 ‘공짜’ 대전차 무기를 러시아군 차량에 아낌없이 퍼부었다. 보병이 각기 다른 대전차 무기를 한두 개씩 등에 메고 다니다 러시아군 차량이 나타나면 발사하는 식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군이 대전차 무기를 다량 보유한 사실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장갑차, 전차에 증가장갑을 설치하는 등 그 나름 대책을 마련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개전 6주째인 4월 7일 기준 러시아는 전차 700대, 장갑차량 1891대, 차량 1361대를 잃었다. 숲과 골목, 건물의 창문이나 옥상 등 그야말로 사방에서 대전차 무기가 러시아군을 노렸다. 러시아가 준비한 증가장갑이나 각종 부착물은 우크라이나군의 대전차 무기를 거의 막아내지 못했다.
러시아가 이번 전쟁에 동원한 전차는 비교적 최근 개량된 T-80BMV, T-72B3와 구형 T-90A 등이다. 모두 러시아가 자랑하는 폭발반응장갑 콘탁트(Kontakt)-5나 최신형 반응장갑 렐릭트(Relikt)를 포탑과 차체에 도배하듯 붙인 모델이다. 콘탁트-5는 대전차고폭탄(High Explosive Anti Tank·HEAT)에 대해 600㎜급, 렐릭트는 900㎜급 방어 능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200~600㎜ 관통력을 지닌 우크라이나군의 보병 휴대용 대전차 무기로는 이론상 격파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론은 이론일 뿐, 현실에서 러시아군 전차들은 대전차 무기를 맞고 격파됐다. 우크라이나군이 근거리에서 전차 후면이나 구동부 등 증가장갑이 없는 약점을 노렸기 때문이다. 러시아군 전차는 포탑 주변으로 자동장전장치용 탄약이 둥글게 배치돼 있다. 대전차 무기가 이 부분을 직격하면 내부 포탄이 유폭을 일으켜 포탑이 날아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우크라 못잖은 北 대전차 역량
2015년 북한 ‘노동신문’이 공개한 북한군 대전차 화기 사격 대회 모습. [동아DB]
문제는 기갑전력의 취약점이 비단 러시아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은 우크라이나 못지않게 다량의 대전차 무기를 보유한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 유사시 북한으로 진격한 한국군 전차와 장갑차는 문자 그대로 지옥 같은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북한군 편제상 1개 보병분대마다 대전차 무기 발사관 2개가 있다. 480여 명이 정원인 보병대대 하나에 ‘7호 발사관’으로 불리는 RPG-7이 58개나 편제돼 있다. 이와 별개로 대대급 제대마다 편성된 대전차소대는 불새 시리즈 또는 옛 소련제 AT-3/4/5/7/9 발사기 최소 3기와 82·107㎜ 비반충포(무반동총) 3문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군 기갑전력이 북한군 1개 대대를 제압하려면 대전차 로켓이나 미사일, 비반충포탄 최소 64발을 막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북한군의 대전차 전력을 제대별로 살펴보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북한군 보병연대 예하에는 구형 대전차포 6문 또는 대전차 미사일 발사기 18기를 가진 1개 대전차대대가 있다. 전투지원 부대인 공병중대와 통신중대, 본부대 및 지원대에도 발사관이 각각 3개씩 편제돼 있다. 상위 제대인 사단급도 마찬가지다. 대전차대대에 12문 이상의 대전차포 또는 18기 이상의 대전차 미사일이 편제된 상태다. 북한군은 전시가 되면 이른바 ‘복종변경’, 즉 일종의 배속 개념으로 각 제대의 화력 자산을 하급 부대로 내린다. 그럼 북한군 1개 대대는 100발 이상의 온갖 대전차 무기를 퍼부을 수 있는 엄청난 화력을 갖게 된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북한으로부터 수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전차 미사일 불새. [동아DB]
전차·장갑차 성능 개량 핵심 ‘방어력’
평원이 광활하게 펼쳐진 우크라이나와 달리 한반도는 산과 계곡이 많아 보병이 숨을 곳이 천지다. 이런 전장 환경에선 세계 최강 방어력을 지닌 미국 M1A2 전차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대전차 무기가 날아와 전차의 엔진룸이나 옆구리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국군 전차는 대전차 무기를 통한 기습 공격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군이 여전히 400여 대 이상 보유한 구형 M48 계열 전차는 어느 방향에서 어떤 대전차 무기를 맞아도 100% 파괴된다. 심지어 M48 시리즈 전차의 측면·후면은 주포나 대전차 미사일이 아닌 기관포에도 관통될 정도다. M48 계열 전차에 폭발반응장갑을 장착하는 방안이 검토됐지만 비용 문제로 취소됐다. ‘슬랫 아머’(철망형 장갑)는 주행 중 시야를 제한해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못했다.국산 K1 계열 전차나 최신형 K2 흑표 전차의 방호 태세도 점검해야 한다. 세라믹 같은 신소재를 이용한 이들 전차의 전면 복합장갑은 앞서 소개한 그 어떤 대전차 무기의 직격도 견딜 수 있다. 다만 여느 전차처럼 측면·후면 방호력은 대단히 취약하다. K2 전차용으로 10년 전 개발된 능동방어장비는 요격탄 발사로 근처 아군 보병이 다칠 수 있고 관련 교리도 미비하다는 이유로 양산되지 못한 실정이다.
1000만 원 정도 가격의 대전차 무기 한 발에 100억 원을 호가하는 전차가 고철이 될 수 있다. 20년 전 이라크 전쟁에서부터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이어지는 전훈이다. 이 때문에 세계 주요국은 전차·장갑차의 두께를 늘리고 적 대전차 무기를 탐지해 요격하는 능동방어시스템, 원격조종 기관총 시스템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10~20t 정도이던 차륜형 장갑차도 이제 30~40t으로 덩치를 키워 중장갑과 능동방어시스템을 갖췄다. 전차 역시 화력보다 방어력 강화에 성능 개량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러시아군 기갑부대의 망신을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아 한국군도 교리와 장비를 보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