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 1월 1일자 ‘하퍼스 위클리’ 표지 그림 속 산타. 토마스 내스트가 그린 이 그림이 현대적 산타의 원형이다. [위키미디어]
그 자신의 순간이동 속도는 그것보다 더 빨라야 한다. 전 세계 20억 명의 어린이가 사는 7500만 가구를 하룻밤에 돌려면 굴뚝이나 창문으로 들어가 선물을 놓고 나오는 데 100만 분의 1초밖에 걸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마블코믹 속 슈퍼히어로 앤트맨처럼 양자역학의 원리를 이용해 시공간을 넘나드는 것 아니냐는 가설까지 등장했다.
눈치 챘겠지만 그 주인공은 전 세계 어린이들로부터 그 어떤 아이돌 스타보다 많은 팬레터를 받는 산타클로스다. 산타의 공식 복장은 가장자리를 흰색으로 장식한 빨간색 의상과 모자다. 빛나는 코를 자랑하는 루돌프를 비롯한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하늘을 난다. 또 엘프로 불리는 뽀족귀 요정의 도움을 받아 1년 내내 엄청나게 많은 선물을 준비한다. 북극에 비밀기지까지 갖추고 있으며 함께 사는 아내까지 생겼다.
1930년대 코카콜라 광고 속 산타클로스. 해돈 선드블롬의 작품이다. [코카콜라]
4세기 소아시아(현 터키)의 대주교였던 성 니콜라오(270~343)를 모델로 한 산타는 전통적으로 초록색 옷차림이었다. 1931년 코카콜라는 주로 여름에 소비가 많은 청량음료시장을 겨울까지 확장하고자 산타를 광고모델로 쓰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거액을 주고 북유럽 이민2세대 그래픽디자이너 해돈 선드블롬(1899~1976)을 고용했다. 빨간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코카콜라 로고를 연상케 하고자 산타에게 흰색 털이 달린 빨간색 외투와 모자를 씌우고 포인트를 주려 검정 벨트를 채웠다. 불그스레한 얼굴에 흰 수염을 길게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며 달콤한 탄산음료를 즐길 줄 아는 ‘할배’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뚱뚱한 몸매에 넉넉한 미소를 짓게 했다는 것이다.
1914년 산타클로스를 그린 일본 삽화. [위키미디어]
니콜라오 성자, 신터클라스, 크리스 크링글…
13세기에 그려진 성 니콜라오 대주교 초상화. [위키피디아]
영국과 네덜란드는 신교 국가다.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의 결과로 탄생한 신교문화권에선 크리스마스를 경건하고 검소하게 보내자는 문화가 확산됐다. 가톨릭의 성인인 니콜라오 대주교의 축일인 12월 6일 전날 선물을 나눠주던 풍습도 사라졌다.
니콜라오 대주교는 본디 엄청난 부자였는데 자선사업으로 그 돈을 다 나눠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사창가로 팔려가게 된 세 딸을 도운 일이다. 니콜라오는 이들을 돕고자 사흘에 걸쳐 밤마다 몰래 금화가 한가득 든 자루를 가져다 놨다고 한다. 빚을 갚고 결혼지참금으로 쓰라고 딸들에게 각각 한 자루씩 금화를 익명으로 선물한 것이다. 그러다 마지막 날 정체가 탄로 나자 비밀에 부쳐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가톨릭 국가에선 이 설화를 토대로 니콜라오 축일인 12월 6일(니콜라오의 기일)을 전후해 가까운 사람의 신발에 몰래 선물을 놓고 가는 풍습이 생겼다. 오늘날 양말로 바뀌었지만 원래는 현관에 놓인 신발이었다. 산타가 자루를 메고 다니는 것 역시 이 풍습에서 연유했다.
신교 국가에서 이런 풍습은 대부분 사라졌다. 오랜 종교전쟁으로 신구교가 함께 살아야 했던 네덜란드는 예외였다. 니콜라오 축일 이브인 12월 5일 신터클라스라는 캐릭터가 즈바르터 핏(검은 피터)이라는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착한 어린이에겐 선물을, 나쁜 어린이에겐 매질을 하고 돌아다니는 풍습이 살아남았다. 신교도도 이를 ‘예수의 어린이’라는 뜻의 크리스트킨들(영어로는 크리스 크링글) 캐릭터로 전승시켰다.
19세기 뉴욕에서 재탄생한 산타
1804년 거부이자 골동품 수집가였던 존 핀타드(1759~1844)가 니콜라오 축일인 12월 6일 뉴욕역사학회를 창립하면서 신터클라스를 뉴욕의 박애정신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삼자고 제안했다. 당시 뉴욕의 크리스마스는 술 마시고 흥청망청 놀다 패싸움이 벌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이런 크리스마스 문화를 바꾸기 위한 제안이었다. 그는 1810년 니콜라오 성자를 뉴욕의 수호성인으로 삼자는 제안을 담은 보고서도 제출했다.1809년 뉴욕역사학회 회원이 된 문필가 워싱턴 어빙(1783~1859)은 이에 자극받아 1809년 네덜란드 식민도시 시절 뉴욕의 역사를 담은 ‘오래된 뉴욕의 역사’를 출간하면서 마차를 타고 다니며 선물을 나눠주는 니콜라오 성자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어빙은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즐겨 입던 바지인 ‘니커보커’라는 필명을 사용했기에 이 성자는 ‘세인트 닉’으로 불리게 됐다.
이를 읽고 영감을 받은 ‘니콜라오 성자의 방문’이라는 시가 1823년 12월 23일 미국 뉴욕의 작은 신문인 ‘트로이 센티널’에 실렸다. 56행으로 된 이 시에서 니콜라오 성자는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지붕 위를 날아다니며, 굴뚝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형상화됐다. 또 눈처럼 흰 수염을 기르고 장밋빛 볼에 체리 같은 코를 하고 유쾌한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배가 출렁이는 배불뚝이로 그려졌다. ‘호호호’ 하고 웃는 유쾌한 뚱보 할배 이미지의 탄생이었다. 신앙심 깊은 수도자답게 마른 몸매에 못된 어린이에겐 회초리까지 휘두르는 신터클라스와 차별화되는 산타클로스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익명으로 발표됐던 이 시의 지은이를 두고는 뉴욕신학대 교수였던 클레멘트 무어라는 주장과 헨리 리빙스턴 주니어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분명한 것은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라는 별도의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시를 기점으로 12월 5일 활약하던 신터클라스가 12월 24일 활약하는 산타클로스로 바뀌게 됐다는 점이다.
빨강 의상의 비밀
1863년 1월 3일자 ‘하퍼스 위클리’ 표지 속 산타클로스. 1902년 미국 유머잡지 ‘퍽’ 표지에 등장한 산타클로스. 1909년 미국 크리스마스 엽서 속 초록 의상의 산타. 1918년 미국 정부기관의 포스터 속 산타클로스(왼쪽부터). [The Ferret, 미주리역사박물관]
내스트는 20여 년간 뉴욕 정치주간지 ‘하퍼스 위클리’의 표지를 장식한 캐리커처와 만평을 담당했다. 그중에서 1863년 1월 3일자에 등장하는 산타가 오늘날 산타의 이미지와 흡사하다. 애국심을 강조하고자 미국 국기 성조기에 그려진 스타(별)가 상의에, 스트라이프가 바지에 그려진 점이 다르다. 그러다 1881년 1월 1일자 표지를 장식한 ‘메리 올드 산타클로스’에서 빨강 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니콜라오 성자의 방문’에서 영감을 받은 흔적이 뚜렷한 이 그림이 이후 산타 이미지의 원형이 됐다는 것이 미국 학계의 중론이다.
사실 산타의 의상이 무슨 색깔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세 이후 가톨릭 주교들은 고귀함을 드러내기 위해 빨강 외투를 걸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바이킹의 본거지였던 북유럽과 그 침공을 받은 영국에는 매년 12월 겨울을 끝내고 봄의 행복을 알리는 ‘겨울왕’의 전설이 있었다. 북유럽 신화의 주신인 오딘의 변형으로 보이는 이 겨울왕은 봄을 상징하는 녹색의 긴 의상을 입고 나타나 먹고 마실 것을 나눠줬는데, 영국이 기독교 국가가 된 후에는 ‘파더 크리스마스(Father Christmas)’라는 캐릭터로 계승됐다.
특히 헨리 8세가 국교회를 만들어 로마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한편으론 교황청에 맞서고 다른 한편으론 크리스마스를 적대시하는 청교도와 차별화를 위해 ‘파더 크리스마스’를 ‘크리스마스 경’으로 격상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 크리스마스 붐을 새로 일으킨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1843)에 등장하는 3명의 크리스마스 유령 중 현재의 유령이 바로 관대하고 자비로운 ‘파더 크리스마스’의 변형이라는 연구도 있다.
따라서 산타클로스가 초록 의상이 아닌 빨강 의상을 입는다는 것은 북유럽적인 전통과 차별화된 신대륙적 전통의 확립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내스트의 그림은 바로 이런 전통의 확립을 보여준다.
1931년 12월 산타가 등장한 빨강 의상의 코카콜라 광고. [코카콜라]
결국 산타는 가톨릭문화에서 시작됐지만 종교개혁으로 변형을 거친 뒤 19세기 신대륙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재탄생하고 20세기 코카콜라와 함께 전 세계로 뻗어간 캐릭터라고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산타는 20세기 미국에서 탄생한 슈퍼히어로들의 조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