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첼시호텔 인 뉴욕

레너드 코헨의 ‘First We Take Manhattan’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9-07-2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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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뉴시스]

    [AP=뉴시스]

    미국 뉴욕에서 아침이었다. 나는 맨해튼의 메이시백화점 앞에 쭈그리고 앉아 휴대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미국에 온 지 한 달째, 뉴욕에 온 지는 이틀이 됐다. 미국 여행이 결정됐을 때 가장 먼저 “드디어 뉴욕에 가보는구나”라고 외쳤을 정도로 꼭 가보고 싶던 도시에 왔건만 즐길 수가 없었다. 전화기 너머 여자친구의 쌀쌀한 태도가 극에 달해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사실상 이별 통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헤어지자는 거냐고,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의 시간은 아침 9시였고 여자친구는 밤 11시였다. 드문드문 끊기고 상태도 좋지 않은 스카이프 통화는 나를 더 지치게 했고, 여자친구를 더 차갑게 했다. 전화기가 뜨거워질수록 목소리는 식어갔다. 통화가 끝났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2016년 숨진 레너드 코헨

    레너드 코헨(오른쪽)과 마리안느 일렌. [Roadside Attractions via AP]

    레너드 코헨(오른쪽)과 마리안느 일렌. [Roadside Attractions via AP]

    자포자기로 일정만 채웠다. 아침마다 메이시백화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지나가던 뉴요커들은 잠옷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나를 노숙자로 봤을지도 모른다. 표정을 살폈더라면 실직자로 알았을 테지만.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어느 백인 할아버지가 말버러 한 개비를 건넸다.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위로였을 것이다. “땡큐”라고 인사하며 불을 붙였다. 한국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온도가 영하로 내려간 직후였다. 깊게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담배는 ‘찌익’ 하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마지막 연기를 내뱉고 발로 비벼 껐다. 뉴욕에 와서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인 ‘First We Take Manhattan’이 마음을 뚫고 들어왔다. 

    돌이켜보면 2016년은 음악 팬에게는 참으로 슬픈 해였다. 유달리 많은 스타가 세상을 떠났다. 데이비드 보위, 프린스, 조지 마이클…. 그중 가장 숭고했던 죽음은 데이비드 보위와 레너드 코헨이었다. 그들의 음악적 위대함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감히 내가 ‘숭고’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그들이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한 방식 때문이다. 둘 다 최후 순간까지 음악 작업을 했으며 멋진 유작을 내놨다. 특히 레너드 코헨의 말년은 서산으로 지는 태양처럼 빛났다. 


    음유시인으로 불린 레너드 코헨. [셔터스톡 에디토리얼, AP=뉴시스]

    음유시인으로 불린 레너드 코헨. [셔터스톡 에디토리얼, AP=뉴시스]

    2012년이었다. 8년 만의 신작 ‘Old Ideas’가 나왔다. 이 앨범이 나왔을 때 나는 말 그대로 압도당했다. 모든 욕망이 소멸된, 생의 마지막에서 지혜를 잃지 않은 이의 음악이자 낭송이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SBS 라디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또렷하다. 이 앨범에 담긴 ‘Amen’을 틀었을 때 김창완의 그 경이로워하는 표정이. 그때 스튜디오 안에 흐르던 숭고하기까지 한 공기가. 그 뒤로 레너드 코헨은 2년 뒤 내놓은 ‘Popular Problems’와 인생의 마지막 10월에 남긴 유작 ‘You Want It Darker’에서 구원과 서정의 서사시를 경건하게 노래했다. 



    말년의 작품들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경건해진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2016년 7월 자신의 영원한 뮤즈였던, ‘Hallelujah’ ‘Bird On The Wire’ 그리고 ‘So Long, Marianne’ 같은 명곡에 영감을 불어넣어준 마리안느 일렌의 타계 소식을 듣고 그는 ‘곧 당신의 곁으로 가리라’는 편지를 썼다. 

    ‘뉴요커’와 가진 인터뷰에서 죽음에 대한 질문에 “죽을 준비가 돼 있다”며 “아직 할 일은 많지만 연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던 건 오랜 시간에 걸친 숙고의 결과였을 테다. 살다 죽는 것이 아닌, 의연히 마지막을 준비하는 단계의 악상들을 그는 초월과 성찰의 시, 음악으로 남겼다. 영원한 작별의 순간까지 음악으로 승화시켰던 거장의 짙은 회색빛 마침표였다.

    R.E.M.의 ‘First We Take Manhattan’

    [빌보드]

    [빌보드]

    트리뷰트 앨범 ‘I’m Your Fan’.

    트리뷰트 앨범 ‘I’m Your Fan’.

    밥 딜런과 더불어 음유시인이라는 호칭에 가장 걸맞을 그의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뮤지션을 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러 아티스트가 참여한 ‘I’m Your Fan’이라는 트리뷰트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만 꼽아봐도 된다. 세상이 얼터너티브의 물결로 들끓기 시작하던 1991년 발매된 이 앨범에는 당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 대거 참여해 이 위대한 싱어송라이터의 대표곡들을 돌아가며 불렀다. 

    대부분은 그 후에도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렀지만, 1990년대라는 물결을 타고 세계적 스타가 된 이들도 있다. R.E.M.이 대표적이다. R.E.M.은 이 앨범에서 ‘First We Take Manhattan’을 불렀다. 

    레너드 코헨의 열여섯 번째 앨범 ‘Famous Blue Raincoat’에 담긴 원곡은 어떤 면에서는 촌스럽다. 아직 전자악기가 발전 도상에 있던 1986년의 사운드를 그대로 담고 있다 할까. 화려한 외모의 오버스러운 가수들이 이용했다면 구수했으련만, 이미 중년이던 레너드 코헨의 허스키하고 좁은 음역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밥 딜런의 노래들이 그러하듯, 레너드 코헨의 멜로디는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 재해석될 때 가공된 원석과 같은 빛을 발한다. 제프 버클리와 루퍼스 웨인라이트가 각각 리메이크한 ‘Hallelujah’가 가장 잘 알려진 경우다. R.E.M.역시 그렇다. 

    불안하게 떨리는 마이크 스타이프의 목소리와 이를 뒷받침하는 피터 벅의 예리하고 쓸쓸한 기타는 원곡의 정서가 가진 본질을 극대화한다. 동경하던 낯선 곳에 첫 방문했을 때의 막막함과 설렘, 그 교차점에 찍히는 좌표 말이다. 처음으로 정한 해외 여행지에서 누구나 느꼈을 바로 그 감정. 1986년 레너드 코헨이 숨겨둔 원석에 1991년 R.E.M.이 공기가 흐르는 빛을 불어넣었다.

    조플린&코헨@첼시호텔

    첼시호텔(왼쪽)과 재니스 조플린. [위키피디아]

    첼시호텔(왼쪽)과 재니스 조플린. [위키피디아]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는 1960년대 뉴욕 언더그라운드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팝 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의 ‘팩토리’가 있던 곳도 여기고 수많은 문인과 화가, 음악인이 활동하던 동네다. 이 지역을 상징하는 곳이 있으니 이름하여 첼시호텔. 오래된 낡은 호텔이지만 팝 음악사의 성지 중 하나다. 

    1960년대 밥 딜런, 재니스 조플린, 패티 스미스, 톰 웨이츠, 이기 팝 등이 젊은 시절 묵으며 음악과 시를 썼던 곳이다. 청년 레너드 코헨은 여기서 우연히 재니스 조플린을 만났다. 둘은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그 추억을 레너드 코헨은 ‘Chelsea Hotel #2’라는 곡으로 남겼다. 전설적인 예술인들이 거쳐간 이곳 입구에는 코헨의 업적을 기리는 현판이 붙어 있다. 코헨의 가사를 연구하는 학회에서 붙였다. 

    씁쓸하던 뉴욕 여행 중에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간 첼시호텔은 리뉴얼을 하고 있었다. 문득 근황이 궁금해 검색해보니 여전히 공사 중이다. 언젠가 다시 뉴욕에 가게 되면, 그때 첼시호텔이 재개장한다면 그 안에 들어가 레너드 코헨의 음악을 들을 것이다. ‘First We Take Manhattan’도 들으며 그날 아침과 밤을 떠올릴 것이다. 오래된 책 속의 책갈피 같은 기억들을 떠올릴 것이다. 화석 같은 과거를 견고히 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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