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존 케이지의 대표곡 ‘4분 33초’. [유튜브 캡처, 뉴욕 공공 도서관]
이 근사한 말을 남긴 미국 작곡가 존 케이지(1912~1992)의 대표곡은 ‘4분 33초’입니다. 이 연주곡은 총 세 악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1악장은 33초, 2악장은 2분 40초, 3악장은 1분 20초로 모두 합치면 4분 33초가 됩니다.
이 곡은 악기를 단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는 사람도 쉽게 연주할 수 있습니다. 1952년 8월 29일 미국 뉴욕주 우드스톡 매버릭콘서트홀에서 이 곡을 처음 연주한 데이비드 튜더(1926~1996)는 피아노를 썼습니다. 튜더는 피아노 덮개를 여닫는 것으로 연주 시작과 끝을 알렸습니다.
재미있는 건 연주를 시작할 때는 피아노 덮개를 닫고, 끝낼 때는 열었다는 점입니다. 덮개를 닫으면 건반을 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실제로 튜더는 연주 내내 어떤 건반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저 덮개 위에 스톱워치를 놓고 시간이 흘러가길 기다렸을 뿐입니다.
이 곡 악보에도 ‘침묵’을 뜻하는 음악용어 ‘타셋(Tacet)’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케이지는 “이 곡에 침묵 같은 건 없다”고 설명합니다.
케이지는 첫 공연이 끝난 뒤 “사람들은 듣는 법을 몰라서 침묵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우연적인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며 “1악장에서는 콘서트홀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들렸고, 2악장 때는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렸으며, 3악장 때는 청중이 웅성대면서 걸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곡 전체가 온갖 흥미로운 소리로 가득 찼다”고 말했습니다.
그냥 외우면 되잖아?
네, 이 칼럼 소재는 음악이 아니라 야구 맞습니다. 그래도 음악 퀴즈 하나만 더 풀어보죠.‘4분 33초’를 연주할 때는 악보가 필요할까요? 프로연주자 또는 지휘자 가운데는 악보를 통째로 외워 기억하는 암보(暗譜) 능력이 일반인보다 월등히 뛰어난 이가 적잖습니다.
20세기 최고지휘자로 꼽히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가 대표적 사례. 토스카니니는 공연을 앞두고 E음을 내는 키가 고장 나 얼굴이 하얗게 질린 클라리넷 연주자에게 “오늘 연주할 곡에는 클라리넷이 E음을 내야 하는 경우가 없으니 안심하게”라고 말했을 정도로 악보를 잘 외웠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은 벌거숭이’ 모드로 말씀드리면 ‘4분 33초’를 지휘할 때는 사실 아무 액션도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곡의 악보를 꼭 챙겨 무대에 오르는 지휘자가 적잖습니다. 어떤 지휘자는 악장별 시간이 지날 때마다 실제로 페이지를 넘기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간단합니다.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클라라 슈만(1819~1896)이 1837년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의 ‘열정’ 소나타를 암보로 연주하기 전까지는 악보 없이 무대에 오르는 게 건방진 행동으로 통했습니다. 음악성보다 기억력을 자랑하려는 철없는 행위라고 판단했던 겁니다.
이제는, 특히 한국에서는 반대입니다. 악보를 외우지 못한 채 무대에 서는 독주자나 지휘자는 기본이 안됐다는 평가를 받기 십상입니다. 요엘 레비(69) KBS교향악단 음악감독은 “한국에서는 나에게 어떻게 모든 곡을 외워서 지휘하느냐는 질문을 유독 많이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드디어 야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즘 것들은 수비 페이퍼도 못 외우고 말이야!
5월 21일 삼성 라이온즈 박해민이 한화 이글스와 경기 도중 수비 페이퍼를 꺼내 봐 논란이 되고 있다. [MBN 캡처]
혹시 모르는 분들이 있을까 싶어 설명드리면 수비 페이퍼는 상대 타자의 타구 정보를 적은 종이를 가리키는 표현. 삼성 선수들이 이 종이를 휴대한 채 다음 타자에 대한 수비를 준비하는 장면이 TV 중계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이를 본 일부 구단에서 ‘불공정 정보의 입수 및 관련 행위 금지’를 규정한 한국야구위원회(KBO) 리그 규정 제26조를 들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러자 KBO는 다음 번 운영위원회(10개 구단 단장 회의)에서 결론이 나올 때까지 이 종이를 사용하지 말라고 삼성에 전달한 상태입니다.
수비 페이퍼를 계속 써도 무방하다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미국 메이저리그를 예로 듭니다.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다 보면 야수들이 경기 도중 종이를 꺼내 팀 투수와 상대 타자의 유형, 아웃·볼 카운트에 따라 자기 수비 위치를 정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적잖은 포수가 상대 타자 공략법을 비롯해 팀 사인 체계가 고스란히 담긴 ‘플레이 북’을 둘둘 말아 팔목에 감은 채 경기에 나섭니다. 투수도 마운드에서 상대 타자 정보가 담긴 쪽지를 활용합니다.
오픈 북을 허(許)하라!
2018년 9월 2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시카고 컵스의 경기에서 3루심이 필라델피아 불펜 투수 오스틴 데이비스(왼쪽)의 커닝시트 사용을 확인하고 있다. [AP=뉴시스]
염경엽 SK 와이번스 감독은 “(플레이에 필요한 세부 정보를) 숙지한 상태로 경기를 치르고 중간에 놓친 부분이나 바뀐 게 있으면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구단에서 전력 분석 결과를 담아 제공한) 수첩을 꺼내 재확인하는 방식으로 시즌을 치러야 자기 것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나요?”라는 학생의 질문에 선생님이 대답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건 저뿐인가요?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대상은 야구를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라 야구로 돈을 벌려고 야구장에 나오는 프로선수들입니다. 이들이 어떤 식으로 자기만의 장점을 만들어 돈을 더 많이 벌 방법을 찾을지는, 규칙을 어기는 것만 아니라면 모두 본인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어떤 연주자는 뛰어난 암보 능력으로 명성을 얻어 돈을 벌고, 또 어떤 연주자는 그때그때 악보를 펴놓고 더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하면서 돈을 버는 것처럼 말입니다.
설령 이들이 야구장에 시험을 보러 나온다 해도 마찬가지. ‘4분 33초’를 연주할 때마다 서로 다른 ‘우연적인 소리’가 가득 차는 것처럼 상대 타자가 때리는 타구도 그때그때 다 다릅니다. 그래서 수비 페이퍼는 미리 답을 써놓은 커닝 페이퍼가 될 수도 없습니다.
지금은 야구 유니폼에 선수 등번호와 이름이 있는 게 기본 옵션이지만 유니폼에 등번호(1929)와 선수명(1960)을 쓰자는 아이디어가 메이저리그에서 처음 나왔을 때는 모든 구단에서 반대 목소리가 더 컸습니다. 등 뒤에 번호와 이름을 쓰면 유니폼 제작비가 더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등번호 도입에 반대할 때는 “진짜 우리 팬이라면 선수 얼굴 정도는 다들 알고 있다”고 했고, 선수명 인쇄 반대 때는 “진짜 우리 팬이라면 선수 등번호 정도는 다들 외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낡은 생각은 결국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변하기 일쑤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결국 ‘4분 33초’ 악보처럼 꼭 필요하지 않지만 굳이 쓰지 말라고 할 필요는 없던 무엇인가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니 수비 페이퍼를 쓸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