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사우 바우하우스 작업장 건물. (왼쪽) 바우하우스의 아버지 발터 그로피우스. [사진 촬영가 루이스 헬트, ©GNTB 독일관광청]
바이마르에 있던 주립 예술공예학교와 회화아카데미를 합병한 이 학교는 이름부터 의미심장했다. 독일어로 바우(bau)는 ‘짓다’, 하우스(haus)는 ‘집’ 또는 ‘건물’이라는 뜻이니 곧 건축학교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동시에 이는 중세 고딕성당 건축에 참여하는 다양한 장인의 길드였던 ‘바우휘테’(bauh¨utte·h¨utte는 ‘오두막’이라는 뜻)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다는 취지가 녹아 있었다.
따라서 바우하우스는 공예, 회화, 조각, 디자인 같은 시각예술을 총체적으로 통합한 건축을 지향하는 학교였다. 그 목표는 바우하우스 창립자이자 명명자였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의 표현을 빌리자면 “위대한 건축예술의 날개 아래 예술을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히틀러 미학의 대척에 섰던 바우하우스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교수주택 중 학장주택. [©GNTB 독일관광청]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시름하던 독일에서 기능성과 심미성의 통합, 미래지향적 국제주의 양식(모더니즘)이 주조해낼 예술공동체를 꿈꿨다. 단순하지만 세련되고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 국적을 초월한 전위적 미를 추구한 것이다. 색의 삼원색(빨강, 파랑, 노랑)과 기하학적 기본 구조(삼각형, 사각형, 원)로 설계된 유아요람, 금속 파이프에 단단히 감긴 천으로 이뤄진 바실리 의자, 원에서 추출할 수 있는 직선과 곡선만으로 구성된 유니버설 서체, 장식 없는 노출 콘크리트와 철, 유리를 적극 활용한 기하학적 건축 구조가 이를 대변한다.
하지만 당대 독일의 정치 현실은 극좌 공산주의와 극우 국가사회주의가 격돌하고 있었기에 이들의 꿈도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1925년 튀링겐주정부의 지원이 끊기면서 안할트주(현재 작센안할트주의 일부)의 주도였던 공업도시 데사우로 옮겨갔던 바우하우스는 1932년 다시 수도 베를린으로 넘어가 생존을 모색했으나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직후 폐교되고 말았다.
젊은 시절 화가와 건축가를 지망했던 히틀러는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대리석 열주와 개선문으로 대표되는 신고전주의 건축의 광팬이었다. 그 입맛에 맞게 베를린올림픽 스타디움과 신총독관저를 설계해 28세에 나치 수석건축가를 거쳐 군수장관 자리까지 오른 알베르트 슈페어의 건축이 대표적이다.
바우하우스의 건축관과 예술관은 그 대척점에 서 있었다. 게다가 바이마르 시절엔 정치적 중립을 표방했지만 데사우 시절 학장 마이어가 사회주의자였던 탓에 ‘적색의 바우하우스’로 불린 점이 히틀러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 3대 학장이던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정치색을 덜어내는 데 주력했으나 현실은 그런 중립적 태도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나치는 국가 지원의 대가로 좌파 학교의 이미지가 강했던 바우하우스를 나치미학의 선전장으로 전향시키려 했다. 예술가적 양심상 이를 수용할 수 없었던 바우하우스 교수들은 결국 폐교를 선택했고, 미국과 러시아 같은 제3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을 맞은 독일에선 이를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와 전시가 열린다. 독일관광청에 따르면 바우하우스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축을 포함해 20세기 주요 건축물을 탐방할 수 있는 ‘모더니즘 그랜드 투어’가 올해 내내 펼쳐진다. 4월 1일부터는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박물관에서 특별전시가 열린다. 또 1년여 동안의 재단장을 거쳐 9월 8일 새롭게 개장하는 데사우 바우하우스 박물관에선 특별전시, 공방체험, 학술대회가 줄줄이 열린다. 베를린 갤러리에서도 9월 6일부터 내년 1월 27일까지 특별전시가 예정돼 있다.
바우하우스는 왜 재건되지 못했나
바우하우스의 바실리 의자(왼쪽)와 바우하우스 유아요람.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베를린공대에서 건축이론을 전공한 김영철 배재대 교수는 “독일 건축사의 흐름에서 보면 바우하우스는 이단적 존재에 가깝다”고 말했다. 독일 건축의 전통은 북부 프로이센 스타일, 남부 바이에른 스타일, 서부 쾰른 스타일로 뚜렷이 구분될 만큼 지역별 역사와 전통에 착근돼 있다. 바우하우스는 이에 반기를 들고 초국가적 보편의 건축미학을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극히 이례적 운동이었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진출한 핵심 구성원이 성공적으로 뿌리 내림에 따라 독일 본토에서 바우하우스 전통은 오히려 시들해졌다. 바우하우스의 아버지 그로피우스는 1937년 미국 하버드대 건축과 교수, 미스 반 데어 로에는 1938년 일리노이공과대(IIT)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제자들과 함께 바우하우스 전통을 미국에 이식했다. 특히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설계한 뉴욕 시그램 빌딩과 시카고 IBM 빌딩이 20세기 미국 건축의 기념비적 존재가 됐다.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미국 시카고에서 ‘뉴 바우하우스’ 운동을 펼쳤고, 바우하우스 학생 출신으로 교수가 됐던 요제프 알베르스는 예일대 미대 교수로 미국 추상표현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역시 바우하우스 학생으로 타이포그래피 공방을 이끈 헤르베르트 바이어 역시 1938년대 미국으로 이주해 ‘세계지리지도(world geo-graphic atlas)’ 그래픽을 총괄하며 미국의 디자인혁명을 선도했다. 바우하우스 시절 바이어는 알파벳 끝을 돌출시키는 장식무늬로 세리프를 없애고 최소한의 기하학적 획으로만 구성된 유니버설 서체를 개발했는데, 이는 디지털 서체의 원형이 됐다.
사회주의자였던 하네스 마이어는 이들과 달리 동쪽으로 건너갔다. 1930년 소련 모스크바대 교수가 됐지만 1936년 외국인 대숙청 대상이 돼 고국인 스위스로 쫓겨 왔다. 그러다 멕시코로 넘어가 멕시코시티 계획에 참여했으나 결국 멕시코 정부와 불화로 다시 스위스로 돌아와 건축가로서 불우한 인생을 마쳤다.
프리츠커상 받은 독일 건축가는 2명뿐
제1차 세계대전 패배 후 독일에서 시작된 바우하우스 운동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해체됐다. 그렇게 해체된 바우하우스의 뿌리는 신대륙 미국으로 이식되면서 다양한 열매를 맺었다. 20세기 중·후반 시각예술 분야에서 미국이 두각을 나타낸 것을 바우하우스의 실험정신을 적극 수용한 결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바우하우스의 공백으로 독일 건축이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는 것.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 중 독일인은 2명뿐이다. 1986년 수상자인 고트프리트 뵘과 2015년 이례적으로 사후 수상한 프라이 오토. 바우하우스 전통을 적극 수입한 미국과 일본 건축가는 각각 8명이고 영국 건축가는 4명이다. 독일 유학생 출신인 박찬익 굳자인건축사사무소 소장도 “견실하고 합리적 건축가를 많이 배출하긴 했지만 국제적 스타 건축가는 상대적으로 적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바우하우스 정신의 계승을 내세운 독일 대학이 있었다. 1953년 독일 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공업도시 울름에 문을 연 울름조형대다. 기술과 예술의 통합, 사이버네틱스에 가까운 환경디자인(Umweltgestaltung)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며 독일 전자업체 브라운과 손잡고 디자인혁명을 선도했다. 아이폰 디자인이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15년 만인 1968년 68혁명 직후 문을 닫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가 좌익 학생들의 온상이라는 것이었다. 남다른 존재가 출신지에서 배척받는 현상은 동서고금 공통이라고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