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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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의 시대는 불온하다

정치가 퇴보하거나 정체됐을 때 되풀이해 등장하는 징후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1-25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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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더마이어 화풍의 대표작인 독일 화가 카를 스피츠베크의 ‘일요일 산책’(1841). [위키미디어]

    비더마이어 화풍의 대표작인 독일 화가 카를 스피츠베크의 ‘일요일 산책’(1841). [위키미디어]

    ‘‘작은 것’에 대한 근대인의 기쁨은 20세기 초 시를 통해 전 유럽에 퍼졌지만 그 고전적 모습은 프랑스 국민의 ‘작은 행복’(petit bonheur·쁘띠 보뇌르)에서 찾을 수 있다. 한때 위대하고 영광스럽던 공론 영역이 쇠퇴한 이래 프랑스인들은 ‘작은 것’으로 행복해지는 기술에서 전문가가 되었다.’ 

    독일 출신 사상가 한나(해나) 아렌트가 1958년 발표한 ‘인간의 조건’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 주머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뜻하는 프랑스어 ‘쁘띠 보뇌르’가 일반명사 비슷하게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들어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크고 작은 혁명을 잇달아 겪으면서 정치적 환멸을 느낀 프랑스인들이 일상의 기쁨에 관한 한 장인의 경지에 이르게 됐다는 설명이다. 

    아렌트의 고향 독일에서도 비슷한 용어가 있다. ‘비더마이어(Biedermeier)’라는 고유명사다. 유럽대륙에 혁신의 바람을 불어넣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옛 체제로 복귀를 시도한 빈 체제가 등장하면서 정치적 환멸감에 소시민적 자족의 삶을 찬미하는 문예사조가 유행했다. 1815년 빈 체제 출범부터 1848년 혁명(노동계급 혁명)까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접고 내면의 평화를 중시하면서 사회적 조화와 질서를 동경하는 풍조가 유행했던 이 시대를 비더마이어 시대라 부른다. 문학사조로는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중간에 위치한다.

    쁘띠 보뇌르와 비더마이어

    흥미로운 점은 이 용어가 그런 풍조에 대한 조롱에서 기원했다는 데 있다. 비더마이어 시대가 끝난 뒤인 1855~1857년 뮌헨 주간지에 ‘고프리트 비더마이어’라는 필명으로 일련의 풍자시가 발표된다. 당시 20대의 젊은 의사인 아돌프 쿠스마울과 법학도였던 루트비히 아이히로트가 슈바벤의 초교 교사이자 유명 시인이던 사무엘 프리드리히 사우터(1766~1846)의 시를 패러디한 시들이었다. 

    사우터의 시 중 일부는 슈베르트와 베토벤이 가곡에 차용할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의 치열한 시대조류와 동떨어진 ‘우물 안 개구리’로 살면서 교양과 안위, 자족의 세계를 고답적으로 노래했다는 점에서 독일 청년 지식인의 조롱 대상이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비더마이어는 현실 의식이 떨어지는 속물 부르주아지의 대명사가 됐고, 20세기 들면서 19세기 초·중반의 반동적이고 퇴영적 시대사조를 일컫는 용어로 굳어졌다. 



    비더마이어가 역사적으로 특정 시대를 일컫는 용어가 됐다면 쁘디 보뇌르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소시민적 기쁨을 통칭하는 단어로 굳어졌다. 공론의 세계에서 한 발 물러서 잠시 잠깐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만끽할 줄 아는 심리상태의 일반명사가 됐기 때문이다. 

    힘겨운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마주하는 정성스러운 밥상, 죄의식이 들 정도로 고급스러운 케이크 한 조각, 연인과 친구로부터 받은 깜짝 선물…. 오래 지속될 순 없어도 한순간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주는 사소한 것에서 행복감을 찾는 심리상태의 일반명사가 됐기에 100년 넘는 세월을 견뎌낸 것이다. 일례로 ‘인간의 조건’이 발표되기 10년 전인 1948년 캐나다 출신 샹송가수 펠릭스 르클레르의 ‘Le Petit Bonheur’라는 샹송이 유행했다. ‘눈이 내리네’로 유명한 벨기에의 샹송가수 아다모가 1969년 발표한 ‘Petit Bonheur’도 있다. 이는 2009년 미국 여성 싱어송라이터 에이미 앨런이 발표한 ‘A Little Happiness’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노동하는 동물’의 행복, 소확행

    ‘비더마이어’라는 용어의 탄생에 일조한 독일 시인 사무엘 프리드리히 사우터의 드로잉 초상(1845·왼쪽). 사적 영역을 박차고 나와 공적 영역에서 정치 참여를 통해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 독일 사상가 한나 아렌트. [위키미디어]

    ‘비더마이어’라는 용어의 탄생에 일조한 독일 시인 사무엘 프리드리히 사우터의 드로잉 초상(1845·왼쪽). 사적 영역을 박차고 나와 공적 영역에서 정치 참여를 통해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 독일 사상가 한나 아렌트. [위키미디어]

    2018년 한국 사회에도 유사한 단어가 등장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뜻의 ‘소확행(小確幸)’이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 ‘랑겔한스섬의 오후’(1986)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라는데 김난도 서울대 교수팀이 ‘트렌드 코리아 2018’에서 한국 사회의 새로운 트렌드로 지목해 자기충족적 유행어가 됐다. 삼포세대로 불리는 한국 젊은 세대들이 성취가 불확실한 취업, 결혼, 육아, 내 집 마련 같은 큰 행복을 좇기보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찾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확행은 쁘띠 보뇌르의 계보에 속할까, 아니면 비더마이어의 계보에 속할까. 용어 자체만 보면 쁘띠 보뇌르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시대적 징후가 돼버린다면 비더마이어화할 가능성도 있다. 

    아렌트가 쁘띠 보뇌르를 언급한 이유는 근대 이후 사적 영역의 확대와 공적 영역의 위축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아렌트에 따르면 천부인권사상은 허위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불평등과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하는 동물’에 불과하다. 그런 인간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존재가 되는 것은 정치를 통해서다. 따라서 정치 참여가 없는 인간은 진정한 자유인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3가지로 나눴다. 노동(labour), 작업(work), 행위(action)다. 노동은 인간이 개체보존 및 종족보존을 위해 노고와 고통을 감당하며 해야만 하는 일이다. 작업은 자연을 변형해 인간에게 필요한 인공적 사물을 만들고 유지하는 활동이다. 협의의 예술도 여기에 속한다.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관계의 그물망에서 이뤄지는 일로, 곧 광의의 정치활동이다. 복수의 인간이 공동체를 위해 함께 고민하고 함께 도모하는 활동이다. 

    근대에 이르러 고대에는 ‘노동하는 동물’로서 노예가 주로 떠맡았던 노동과 작업의 영역이 확대했다. 반면 행위(정치)의 영역은 계속 줄어들었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모두 노동으로부터 해방을 부르짖으면서 실제론 정치와 그 결정체인 국가를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 아렌트의 비판이다. 전체주의 독재자나 자본가를 위해 언제든 대체 가능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하는 동물’, 배불리 먹여주고 소소한 취미 활동에 몰두하게 해주면 정치고 자유고 관심 없는 존재로 인류를 길들이려 한다는 것이다. 

    쁘띠 보뇌르와 소확행은 바로 그런 인간의 코앞에 던져진 고깃덩어리다. 그걸 밀쳐낼 줄 알아야 진짜 자유인이다. 사익과 공익을 마구잡이로 뒤섞어놓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에게 공사를 구별하라고 따지는 것, 그게 바로 정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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