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7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정문 앞에서 사법시험 준비생 3명이 사법시험 존치를 주장하며 삭발식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2015년 9월, 이번엔 법무부가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여론조사를 벌였다. 2017년으로 예정된 사시 폐지 여부에 대한 생각을 묻는 내용이었다. 조사 결과 응답자 10명 중 7명이 사시 폐지를 반대(71.6%)했다. 법무부는 이를 근거로 12월 3일 ‘사시 폐지 4년 유예’ 의견을 밝혔다.
꼭 20년 간격을 두고 우리 사회의 법조인 선발 방식에 대한 ‘여론’은 정반대로 뒤집힌 모양새다. 하지만 20년 전 ‘1000명 대상’ 여론조사가 야기했던 사회적 갈등은 세월을 뛰어넘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김영삼 정부의 로스쿨 설립 구상은 법조계 반발 등에 부딪혀 논란을 거듭하다 2009년에야 현실화됐다. 법무부의 ‘사시 폐지 유예’ 의견은 로스쿨 학생과 교수, 졸업생 등을 중심으로 한 또 다른 법조계의 거센 비난에 직면한 상태다. 법무부가 발표 다음 날 바로 “정책 결정을 한 게 아니라 의견을 낸 것일 뿐”이라며 한 발 물러섰지만, 전국 25개 로스쿨 학생들은 집단 수업 거부와 자퇴서 제출 등으로 실력 행사에 나섰다. 12월 7일부터 법무부 앞을 비롯해 청와대, 국회 등 전국 각지에서 릴레이 1인 시위도 벌이는 중이다.
로스쿨생 “가만있다 독도 빼앗긴 셈”
12월 7일 오후 만난 한 사립대 로스쿨 학생 A씨는 격앙된 모습이었다. 대학 졸업 뒤 정보통신분야 기업에 다니다 지난해 로스쿨에 진학했다는 그는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독도를 빼앗긴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다”고 했다.“일본이 매번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우겨도 우리나라가 별달리 대응하지 않는 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 아닙니까. 로스쿨 학생과 로스쿨 출신 법조인들이 그동안 사시 존치론자들에게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도 참고 넘어간 이유가 그와 비슷해요. 2007년 로스쿨법이 통과됐을 때부터 사시 폐지는 정해진 수순이었기 때문에 시시비비를 가려 갈등을 키울 필요가 없다고 본 거죠. 그런데 그사이 사시 존치론자들이 만들어낸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로스쿨에 못 들어간다’거나 ‘로스쿨 졸업생들은 실력이 형편없다’ 같은 허위 주장이 마치 진실인 양 퍼져나가고, 법무부가 국가정책에 대한 신뢰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발표까지 하니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A씨의 말이다. 그는 “5년 넘게 착실히 돈을 벌었고, 정보기술(IT) 분야 전문 변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서른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결심했다”며 “요즘 ‘평생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다’고 생각할 만큼 공부에 푹 빠져 있었는데 당분간 책을 접기로 했다. 법무부가 공식사과하고 당초 계획대로 2017년 사시 폐지를 확정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싸울 생각”이라고 밝혔다.
사시 존치를 주장하는 쪽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사시 준비생 3명은 12월 8일 서울대 로스쿨 학생들의 집단 자퇴서 제출에 항의하는 뜻으로, 서울대 정문 앞에서 단체 삭발식을 벌였다. 로스쿨 자퇴서는 대학원장 등이 승인해야 효력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사시 존치론자들은 “로스쿨 학생들이 학교를 진짜 그만둘 것도 아니면서 쇼를 한다”고 비난하는 상황이다.
백원기 대한법학교수회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가난한 내 제자들 로스쿨 못 간다’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등 비로스쿨 법대 교수들도 이 싸움에 동참하고 나섰다. ‘로스쿨 출신만 법조인이 될 수 있게 하는 건 특권층을 용인하는 것이며 우리 사회의 ‘희망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라는 게 사시 존치론자들의 주장이다. 나승철 변호사(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는 “국민 85.4%가 사시 존치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만 봐도 알 수 있다. 왜 사시를 폐지해야 하나”라고 했다.
12월 4일 서울대 로스쿨의 박준성 학생회장(가운데)과 학생회 임원들이 학생들의 자퇴서를 들고 있다. 서울대 로스쿨 학생 464명은 이날 자퇴서를 학교에 제출했다. 뉴스1(왼쪽) 12월 3일 김주현 법무부 차관이 경기 과천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브리핑룸에서 사법시험 폐지 유예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동아일보
중립적인 의견을 내는 이도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의원은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시절 “변호사 예비시험 제도를 도입해 소수가 되더라도 로스쿨 없이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밝혔고, 관련 법안도 발의한 상태다. 한 사시 출신 변호사는 “로스쿨 출신은 사시가 존재하는 한 내내 ‘2등 변호사’라는 꼬리표를 달게 될까 봐 사시 폐지를 반대하는 것 아니냐”며 “로스쿨을 중심으로 법조인력을 양성하되 기회 보장 차원에서 로스쿨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응시 기회를 주는 작은 문을 하나 열어주면 좋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최근 사시 존치에 대한 갈등이 깊어지면서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점점 이성적 논의가 실종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시 폐지론자와 존치론자 사이 다툼은 논쟁의 범위를 넘어 감정다툼으로 치닫고 있다. 로스쿨 출신 법조인 모임인 한국법조인협회(한법협)가 12월 8일 하창우 대한변호사협회(변협) 회장을 업무방해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발한 것도 한 사례다. 한법협은 “하 협회장이 사시 존치를 위해 정치권 로비를 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감사 자료 제출을 요구했지만 이를 못 하도록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 협회장은 “한법협 측 주장이나 고발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한법협을 무고죄로 고소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이를 계기로 변호사업계가 사시 출신과 로스쿨 출신으로 갈라져 정면대결로 치닫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이 싸움이 계속되면 결국 법조인 전반에 대한 신뢰가 추락해 모두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이라며 “감정다툼을 멈추고 ‘왜 우리가 법조인 선발에 대해 논의하는지’라는 문제의 본령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변호사는 “지금 변호사들의 감정이 격화된 것은 모두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라며 “사시 출신 변호사들은 법학 공부 기간이 짧고 실무 훈련이 부족한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덤핑경쟁을 해 ‘물을 흐린다’고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 반면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은 ‘좋은 시절 변호사가 돼 많은 것을 누린 선배들이 후배들 앞길을 가로막는다’고 억울해한다. 양쪽이 힘을 합쳐 변호사 선발 인원을 조정하거나 효율적인 법조계 인력 운용 방안을 찾는 등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극단으로 치닫는 다툼, 법조계 신뢰 추락
사법시험 존치를 주장하는 한 시민이 로스쿨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뉴시스
하지만 이상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법무부 발표 전날 차관이 와서 설명했을 때 만류했음에도 법무부가 무리하게 발표했다”며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지시했다는 얘기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청와대가 법무부를 동원해 갈등의 불씨를 다음 정권으로 넘기려다 더 큰 폭풍을 맞았다”는 해석도 나온다. 일단 법무부의 ‘4년 유예’안은 사시 존치론자와 폐지론자 모두 반대하는 상황이다.
결국 공은 국회로 넘어가게 됐다. 현재 국회에는 새누리당 오신환 의원 등 여야 의원 6명이 내놓은 사시 존치법안이 제출돼 있다.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사시와 로스쿨이 2017년 이후에도 법조인 선발 제도로 유지된다. 법 개정이 무산되면 로스쿨만 남는다. 예정대로라면 마지막 사시 1차 시험을 치르는 내년을 앞두고 사시 폐지론자와 존치론자 사이에 더욱 치열한 힘겨루기가 벌어질 전망이다. 이에 대해 법조계 안팎에 ‘이성의 회복’을 주문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우리 사회가 어떤 법조인을 원하는지에 대한 폭넓은 논의를 통해 이번에는 지속가능한 해법이 제시되면 좋겠다”며 “수십 년째 법조인 선발 방식을 놓고 갈등을 이어가는 건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