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회계법인 소속 2~3년 차 공인회계사 32명이 내부정보를 이용한 주식 거래로 수억 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사건이 발생했다. 그중 삼일회계법인은 가장 많은 26명이 연루돼 충격을 줬다. 홍중식 기자
“숫자 좀 빨리 보고 돈 버는 게 어때서?”
지난해 10월 삼일회계법인 소속 회계사 이모(29), 배모(30) 씨 등 6명은 회계감사를 담당하던 총 31개 기업의 공시 전 실적정보를 손에 넣었다. 이 가운데 제일기획, 아모레퍼시픽, 엔씨소프트, 대상 등 총 14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적정보가 증권사들의 예상보다 좋으면 주식을 매수했고 나쁘면 매도했다. 이씨와 배씨는 가족에게도 정보를 건네 투자를 권유했고 실제 투자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수법으로 챙긴 부당이득은 총 6억6000여만 원. 검찰은 추징보전 청구로 이를 전액 환수했다.이번 사건에 연루된 회계사는 총 32명으로 삼일회계법인 26명, 삼정KPMG 4명,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2명 등이다. 서울남부지방검찰청 금융조사2부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주범인 이씨와 배씨 2명을 구속 기소하고 상대적으로 이득이 적은 4명은 불구속 기소, 7명은 벌금 400만~1000만 원에 약식기소했다. 나머지 19명은 기업정보를 누설한 혐의로 금융위원회에 징계 통보됐다.
검찰은 이들이 주고받은 모바일 메신저 내용을 공개했는데 직업윤리 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약식기소된 이모 씨는 주범 이씨와 대화에서 “회계사가 다른 직업에 비해 갖는 유일한 장점이 회사 숫자를 좀 빨리 본다는 건데 이렇게 돈 버는 게 답인 듯”이라며 양심의 가책은커녕 도리어 자신의 범법행위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또한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독일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으로 이동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번 사건에 소속 회계사가 가장 많이 가담한 삼일회계법인 측은 난감하다는 반응이다. 한덕철 삼일회계법인 부대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기업의 중요 정보를 접하는 5년 차 이상 매니저들에게는 감시·감독 장치가 충분히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을 저지른 2~3년 차의 경우 감시·감독 장치가 없었던 것이 문제”라고 원인을 분석했다.
해당 직원들의 처분에 대해 묻자 한 부대표는 “검찰에 기소된 직원들은 8월 금융위원회의 조사가 통보됐을 때 이미 회사에서 모두 나갔다. 남은 16명 가운데 자진해서 2명이 그만뒀고, 현재 14명은 남아 있다. 이들은 주식 거래를 하지 않고 주범들이 물어보는 관련 기업정보에 대해 아는 대로 답해주기만 했다. 물론 이들에게 잘못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선의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어 해고 조치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국공인회계사회 윤리위원회 회의에서 내려지는 결정에 따라 처분될 것이라고 한다.
삼일회계법인에 감사를 맡겼던 기업들은 이번 사건으로 상당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한 부대표는 “어떻게 회사 기밀이 직원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느냐고 강력한 항의가 들어왔다. 감시 시스템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다행히 관련 기업 가운데 앞으로 회계감사를 맡기지 않겠다고 통보한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 일을 계기로 9월부터 전 직원 주식 거래 모니터링을 시작하고 감사 대상 기업 주식은 취득 금지 조치했으며, 감사하지 않더라도 다른 회계법인 감사 대상 기업의 주식을 취득하면 신고하도록 시스템을 마련했다. 시스템이 보완됐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문제가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만 자격증 박탈, 강도 높은 제재 필요
기업의 회계감사를 엄격하게 해야 할 공인회계사들이 내부 미공개 정보로 부당이득을 챙긴 이번 사건은 직업 윤리의식이 얼마나 상실됐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동아DB
한국공인회계사회 관계자는 이번 사건이 벌어진 근본적인 원인으로 회계사 지위가 하락했기 때문이라는 시각을 내비쳤다. 그는 “1990년대까지 회계사가 많지 않아 대형 회계법인에서 고액 연봉을 주면서 회계사를 뽑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회계사가 급격히 늘어나 회계사 2만 명 시대를 앞두고 있다. 현업이 1만1000명 정도인데 일감은 그렇게 많지 않다. 연봉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로 10년 전 초임 연봉이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고 설명했다. 반면 업무량은 급격히 늘었다고. 그는 “법인에 입사하면 2년간 수습기간을 거치는데 주니어 회계사들은 1~3월 감사 시즌엔 밤샘 작업이 부지기수다. 급여는 낮고 업무강도는 높다 보니 일각에선 3D직종이라는 말도 나온다. 근무 여건이 악화돼 이러한 사건도 발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봉이 낮고 처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이유가 불법행위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는 없다. 한국공인회계사회 관계자는 이에 동의하며 “이번 사건 이후 현업 회계사를 대상으로 윤리교육을 대폭 강화하는 등 재발 방지를 위한 내부적인 조치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회계법인의 주식 관리체계를 대폭 개선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현행 매니저 직급 이상의 주식 거래 내용 신고체계를 모든 임직원 대상으로 바꾸고, 본인이 참여한 감사 대상 회사의 주식에 한해 거래 제한했던 것을 소속 회계법인의 모든 감사 대상 회사 주식으로 범위를 확대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대형 회계법인 소속 회계사는 주식 거래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시민단체들은 이 같은 조치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처벌이 미약하다는 데 아쉬움을 드러냈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팀장은 “기존에 내부거래를 규제하는 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위법행위임을 인지하고도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은 처벌규정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실형까지 가는 경우도, 자격증이 박탈되는 경우도 드물다 보니 대담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회적으로 이러한 금융범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도 문제다.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니 큰 범죄가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권 팀장은 “이번 사건으로 해당 기업에 투자한 개미투자자들과 여러 주주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분명히 피해자가 있는 범죄사건인데 여기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이 이뤄진다면 또다시 이러한 범죄가 일어날 확률이 크다. 정부가 명확하게 강도 높은 처벌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