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 국가정보원 회의실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병호 국정원장이 생각에 잠겨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1 “8월 실시한 실·국장 인사에서 원장이 총무관리국장으로 지목했던 인사에 대해 청와대가 브레이크를 걸었다고 들었다. 지난해 8월 인사파동에 이어 두 번째다. 국정원 내부의 TK(대구·경북) 출신 비선(秘線)과 청와대 3인방이 관여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지난해 인사파동만 해도 청와대가 C국장을 찍어서 국내보안국장에 임명하라고 했던 것 아닌가.”
“염두에 뒀던 총무관리국장 후보가 있었으나 잘 안 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청와대 관련 부분에 대해서는 인식을 달리한다.”(10월 20일)
#2 “최근 국내보안국을 맡고 있는 C국장의 이름이 내부 인사파동과 관련해 너무 자주 거론되고 있다. 청와대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전횡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시절보다 더하다는 푸념이 있을 정도다.”
“질문하신 취지를 유념하겠다. 내부적으로 조사한 뒤 보고드리도록 하겠다.”(11월 24일)
#3 “C국장이 최근 진행 중인 차장 인사와 관련해 기획조정실장으로 승진 발탁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이 역시 청와대와의 관계 때문인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외부 특정 인사가 기조실장에 임명될 것이라는 소문 역시 마찬가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11월 30일)
일반 정부부처에서 벌어진 일이라 해도 이만하면 중량급 사안. 그러나 해당 조직이 국가 최고정보기관을 자임하는 국가정보원이라면 숨어 있는 의미는 메가톤급으로 커진다. 앞서 대화는 모두 10월 이후 국회 정보위원회 석상에서 오간 문답. 질문자는 정보위 소속 야당 간사인 새정치민주연합 신경민 의원, 답변자는 이병호 국정원장이다. 질문과 답변 모두 각각의 정보위 회의 직후 열린 브리핑을 통해 확인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공식석상에서 오갔고, 공식 경로를 통해 공개된 자료라는 뜻이다.
“이병호와 이병기는 다르다”
‘C국장 문제.’ 최근 국정원 내부 사정에 정통한 인사들은 이 사안을 흔히 이렇게 부른다. TK 출신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이른바 ‘보좌진 3인방’과 두터운 인연이 있다는 국정원 국내파트 국내보안국장. 해당 직위는 국내정보를 분석·총괄하는 자리로, 2차장 산하 국내파트의 수석부서다.2013년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했던 C국장은 출범과 함께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에서 행정관으로 일하다 그해 5월 논란이 됐던 이른바 ‘국정원 정치 개입 문건’ 파문으로 국정원에 원대 복귀한다. 2011년 6월 무렵 야권을 중심으로 제기되던 대학 반값 등록금 운동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처 방안을 담고 있던 해당 문서에 작성자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이름이 들어 있었기 때문.
그러나 1년 남짓 시간이 지난 지난해 8월, 그의 이름은 다시 한 번 도마에 오른다. 이병기 당시 국정원장이 국내보안국장에 임명했던 인물을 청와대가 반대하면서 그 대신 임명하라고 ‘찍어’ 주문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는 이야기였다. 훗날 알려진 일이지만, 이러한 인사파동 배후에는 정윤회-박지만 갈등이 자리하고 있었고, 사안은 ‘청와대의 국정원 인사개입 파동’이라는 이름으로 입길에 올랐다(‘주간동아’ 966호 커버스토리 ‘권력 암투 진실게임’ 참조).
앞서 본 정보위 문답 내용은 다시 1년여가 지난 지금 이른바 ‘C국장 문제’가 급기야 수면 위로 떠오르기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실명이 공식석상에서 거론되고, 3인방과의 관계나 인사전횡 같은 단어가 날것 그대로 공개됐기 때문. 특히 8월에도 총무관리국장 자리를 두고 다시 한 번 소동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현안 중 현안’임을 뜻한다. 잠잠해지기는커녕 점점 커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공개된 내용만으로 상황을 복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당초 8월 실·국장 정기인사를 통해 대대적 개편을 계획했던 이병호 국정원장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30여 명에 달하는 대상 직위 가운데 5명만 교체하는 데 그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의 전신) 해외파트에 근무할 당시부터 인연이 있던 단장급 인사를 총무관리국장에 발령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청와대가 제시한 공식 이유는 ‘해당 인사가 해외 파견근무를 하던 당시 상사와 불화가 있었다’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보위 관계자들은 실제로는 PK(부산·경남) 출신이라는 게 반대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전한다. 주요 직위는 TK 출신이 맡아야 한다는 ‘암묵적 지침’이 작동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총무관리국장은 중간 간부 이하 직원들의 인사자료를 관리·집행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전체 조직을 통제하는 통로에 해당한다는 게 정보위 관계자들의 설명. 이 같은 ‘그림’을 기획하고 청와대 3인방에게 전달해 밀어붙인 당사자가 바로 C국장이라는 게 앞서 본 문답에 등장하는 ‘인사전횡’의 대체적인 얼개다.
10월 이후 이야기는 한 단계 더 뛰어오른다. 조만간 단행될 것이라고 알려진 차장 인사와 관련해 C국장이 기획조정실장에 임명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 김수민 2차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임명된 차장급 간부진을 한꺼번에 교체하는 인사를 준비 중이고, 지난해 정윤회-박지만 파동 과정에서 교체설이 돌았던 이헌수 기조실장 후임으로 C국장이 임명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예산과 조직을 관장하는 기조실장 역시 국정원 전체를 통제하는 직위. 당초 11월 중 단행될 것이라던 차장급 인사는 대통령의 해외순방 일정과 개각 지연 등이 맞물려 연기된 상태다.
“다른 의도로 보기 어렵다”
여기까지 상황을 정리해놓고 나면 정보위에서 오간 짧은 문답이 실제로는 얼마나 큰 폭발력을 담고 있는지 명확해진다. 이 원장이 답변한 내용만 놓고 봐도 그렇다. 국장 인사를 자기 뜻대로 진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은 물론, C국장 실명을 거론한 질의에 대해 부인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는 것은 한층 더 의미심장하다. 국정원 사정에 정통한 인사들은 “원장이 조직 내부 문제, 게다가 청와대와의 알력을 시사하는 질문에 이 정도 수위로 답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사반세기가 가까워오는 정보위 역사상 기관장이 이 같은 언급을 남기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이병호 원장의 일련의 답변이 의도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 대통령직속기관이라는 특성상 국정원은 실·국장 인사도 청와대와의 교감 하에서 진행하는 게 관례였다고는 하지만, 매년 이어지는 브레이크는 반감을 느끼기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두루두루 원만한 관계를 중시하던 이병기 전 원장(현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해 8월 인사파동 당시 침묵을 지켰던 것과 달리, ‘강단 있는 성격’으로 정평이 난 이병호 원장은 두고 보지 않으려 했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문답 내용이 공개될 게 뻔한 정보위에서 일부나마 관련 내용을 인정한 것은 ‘계획적인 불만 표시’ 외에 다른 의도로 보기 어렵다는 게 안보부처 당국자들 사이의 중론이다.
이 원장이 “C국장이 기조실장에 임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 만큼 사안은 이제 둘 중 하나다. 인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에 부담을 느낀 청와대 혹은 3인방이 이 원장의 손을 들어주거나, 반대로 ‘차장급 인사는 청와대 소관’이라는 명분으로 밀어붙이거나. 후자라면 사안은 돌이킬 수 없는 파장으로 번지게 된다. 한 전직 안보당국 고위관계자는 “원장이 공개적으로 밝힌 뜻을 청와대가 꺾는다면 이 원장으로서는 사임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결국 누가 대통령을 설득하느냐가 싸움의 분수령이 되리라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