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외부 변수 영향은 추석 이후 하반기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이벤트가 줄지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신흥국 통화위기가 경계 변수로 떠올랐다. 추석 연휴가 끝난 직후에는 미국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 회의가 예정돼 있다. 기준금리 인상 속도와 미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위원들이 생각하는 금리인상 사이클 종료 시점을 엿볼 수 있어 FOMC 회의는 달러화 가치 향방을 가늠하는 데 중요한 이벤트다. 11월 30일부터는 G20 정상회담이 열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만나는 자리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불참 의사를 밝힌 뒤 중요성이 더 커졌다. 미국은 앞선 11월 6일 중간선거를 치른다. 중간선거 결과에 따라 미·중 정상회담 의제가 달라질 공산이 크다.
목적’의 패권전쟁
투자자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외부 변수는 미·중 무역분쟁이다. 최근 세계 증시를 가장 크게 흔들었던 재료이기도 하다. 언론과 많은 애널리스트는 조기에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경과는 이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시장의 기대가 컸던 8월 미·중 차관급 회담은 서로 의견 차만 확인하고 끝났다. 현재 물밑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해도 겉으로는 G20 정상회담 전까지 잡힌 대화 일정이 없다. 미·중 무역분쟁 장기화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많은 사람이 G2 무역전쟁은 ‘승자 없는 싸움’이 되리라 예상했다. 과거 경험에 비춰 한 판단이다. 1930년 미국이 모든 수입품에 60% 관세를 부과한 적이 있다(스무트-홀리 관세법). 이후 세계 교역량은 2년간 60% 급감했다. 미국의 극단적인 보호무역에 대공황까지 겹쳐 세계 경기침체가 장기화됐다.
미국이 국제정세에서 가장 싫어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축통화인 달러화 위상에 대한 도전 행위고, 다른 하나는 세계 최강인 군사력에 대한 도전이다. 달러와 군사력은 세계 패권국가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다. 그런데 중국과 북한이 각각 달러화 위상과 미 군사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과거에도 그런 미국의 경쟁국가가 있었다. 옛 소련과 일본이다.
미국은 가파른 경제성장에 힘입어 세계 2인자 자리에 오른 옛 소련과 일본을 대상으로 패권전쟁을 벌였다. 미·소 패권전쟁은 냉전체제로 접어들던 1945년부터 소련이 붕괴한 91년까지 계속됐다. 미·일 패권전쟁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일본 제품 수입을 제한한 1981년부터 이 조치가 철폐된 95년까지 이어졌다. 과거 패권전쟁이 다년간 지속됐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힐러리도 나섰을 듯
올해 들어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코스피가 8월 16일 2240.80을 기록하며 연중 최저치를 나타냈다(왼쪽). 미·중 무역분쟁을 주도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뉴시스]
미국은 1980년대 이후 오랜만에 나 홀로 경기호황을 만끽하는 중이다. 미국의 이사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 분기 대비 연 4.2% 증가했다. 애틀랜타 연준이 예측하는 ‘GDPNow’ 모델은 삼사분기 GDP 증가율이 연 4.4%이다. 이 같은 나 홀로 호황은 패권전쟁에 나서게 된 자신감이자 동력이다. 미국 경기를 그대로 놔두면 2019년 이사분기나 삼사분기에 정점을 찍을 개연성이 높다. 트럼프 대통령은 패권전쟁을 통해 경기호황의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다. 다음 대선이 2020년 11월에 있기 때문이다. 현직 미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는 제1변수로 꼽히는 것이 바로 경기상황이다.
지난해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뉴시스]
중국은 1, 2차 산업으로 성장했다. 3차 서비스 산업은 시장 개방을 제한하고 있다. 금융 분야가 그에 해당한다. 기술 중심의 4차 산업과 관련해 중국이 발표한 ‘중국 제조 2025’ 플랜은 미국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 플랜에는 첨단기술 대국이 되고자 하는 중국의 야심이 담겨 있다. 미국으로서는 중국 제조 2025를 중국이 G2를 넘어 G1이 되고자 하는 계획서로 볼 수밖에 없다.
미국은 중국 측에 자본시장 개방, 4차 산업 관련 지식재산권에 대한 정당한 지급을 요구한다. 여기에 중국이 미국 국채 보유를 늘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을 듯하다. 만성 재정적자 국가인 미국은 국채 발행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는데, 중국이 보유한 미국 국채 규모는 1조2000억 달러(약 1353조7000억 원 · 총 발행액의 7.1%)에 멈춰 있다. 중국은 미국 국채 매입을 줄이는 대신, 미국 기술에 대한 인수합병(M&A)에 나섰다. 미국은 중국의 ‘기업 사냥’에 따른 기술 유출을 우려한다. 미·중 무역분쟁은 어쩌면 언젠가 한 번쯤 치러야 하는 패권전쟁인 것이다.
‘대북관계 개선’이 유일한 희망
대북특별사절단 단장인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왼쪽)이 9월 5일 오후 평양 노동당 본관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있다. [뉴시스]
패권전쟁이 장기화되면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추가 조치를 내놓을 수 있다. 사견이지만 환율조작국 지정이나 추가 관세 부과 등이 이뤄질 개연성이 크다고 본다.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고 관세율을 50~60%로 상향 조정하면 외국 자본이 ‘탈중국’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중국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바가 아닐까 싶다.
국내 상장사들의 영업실적은 대외적으로는 G2 패권전쟁, 대내적으로는 최저임금인상과 근무시간 단축(52시간 근무제)에 따른 인건비 증가 탓에 악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이미 상장사들의 이사분기 실적이 심상치 않고, 하반기 수익 예상도 하향 조정될 가능성이 높다. 애널리스트들이 현재 내놓은 하반기 수익 예상에는 대내외 여건 악화가 아직은 충분히 반영돼 있지 않다. 애널리스트들의 수익 예상은 상향 시에는 공격적이지만, 하향 시에는 후행(後行)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한국 경제가 대내외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는 희망은 있다. 대북관계 개선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진전시킬 경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조치가 풀리고, 뒤이어 북한 경제개발을 위한 대형 프로젝트들이 진행될 것이다. 수익성이 높은 프로젝트는 G2가 수혜를 보겠지만, 한국이 누릴 수 있는 분야도 적잖을 터다. 북한의 비핵화 문제는 G2 패권전쟁과 연결고리가 없지 않아, 장기간에 걸쳐 완성될 것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 경제는 북한의 비핵화 진전이 희망이자 돌파구다.
터키·아르헨티나 외 확산만 막는다면
터키 리라화 가치가 폭락한 직후인 8월 17일 터키 이스탄불의 대표적 쇼핑 명소인 그랜드 바자르로 몰려나온 관광객들. [뉴시스]
관건은 이 같은 위기가 다른 신흥국으로 확산될지 여부다. 세계 증시가 신흥국 금융 불안에도 반등 추세에 있는 이유는, 두 나라의 세계 GDP 내 비중이 2% 내외로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신흥국 가운데 재정취약국으로 분류되는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인도네시아로까지 위기가 확산될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6개 재정취약국의 세계 GDP 내 비중은 6.8%이다(2017년 기준). 유럽 재정위기 국가(PIIGS·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의 비중이 6% 내외였던 점을 고려하면 신흥국으로 확산 여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투자자들은 아르헨티나와 터키가 촉발한 신흥국 불안이 재정취약국을 거쳐 신흥국 전반으로 확산할 것을 우려한다. 달러 가치 상승, 미국 통화정책 정상화가 신흥국 통화 불안을 유발했던 2013년 긴축 발작 때, 그리고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와 유사한 상황을 재현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시장 환경만 놓고 보면 현재는 1997년과 다르다.
아시아 외환위기 전 아시아 신흥국은 견조한 수출과 안정된 환율 유지에 기반을 두고 고속성장을 구가했다. 중국은 1992 ~95년 두 자릿수 성장을 달성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한국이 모두 7% 이상 성장했던 시기다. 아시아 경제성장은 미국 등 외국인 투자자의 투자심리를 자극했다. 선진국 금융시장은 당시 저금리로 투자처를 한창 물색하는 중이었다. 일본 장기불황에 따른 저금리로 엔화 차입 비용이 낮아져 투자에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 형성됐다. 선진국 투자자들은 ‘엔 캐리 트레이드’로 아시아 국가 고수익 증권 투자에 열을 올렸다.
당시 대부분 아시아 국가는 달러 페그제(peg system·자국 통화 가치를 달러에 묶어두고 정해진 환율로 교환을 약속한 환율제도)를 도입하고 있었다. 기업이 환율변동을 겪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선진국 투자자들은 환율변동 위험이 없는 고성장 기업에 투자할 수 있다는 장점에 매력을 느꼈다. 이들은 아시아 국가가 은행 안정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은행 종목 투자에 집중했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촉발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환율 고평가와 금융시장 개방 확대다. 달러 페그제는 아시아 국가의 펀더멘탈 이상으로 환율이 고평가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아시아 국가의 실질실효환율은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 대체로 높았다. 실질실효환율이 100 이상으로, 구매력 대비 환율 고평가가 나타났던 시기다. 태국 바트화를 시작으로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홍콩, 대만, 한국 통화는 연쇄적으로 투기자본의 공격을 받았다. 환율방어에 성공한 국가는 홍콩 정도다.
6개 재정취약국 실질실효환율은 과거 아시아 외환위기를 경험한 국가 수준보다 낮다. 재정취약국 가운데 외채 비중이 가장 낮은 인도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실질실효환율은 기준선을 하회한다. 이는 구매력 대비 환율이 저평가됐음을 의미한다(그래프3 참조).
금융시장 개방 정도도 다르다. 과거 아시아 외환위기 국가가 자본계정 제한을 급격하게 완화하면서 해외 자본과 경기에 너무 노출됐다.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해 자본계정 제한을 완화했던 한국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당시와 다르다. 외환위기 이후 20년 동안 신흥국은 여러 안전장치를 도입하고 자본계정 완화도 순차적으로 진행해왔다. 현재는 여러모로 1997년과 다른 상황이다.
‘플라자 합의’ 참고할 만
신흥국은 외환위기 이후 평화를 누려왔다. 2002년 후반부터 2008년까지 신흥시장에 위기는 없었다. 이는 외부 조건의 호조 덕분이다. 미 연준이 디플레이션을 막고자 금리를 인하하자, 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은 신흥국 부채 상환을 쉽게 만들어줬다. 세계경제는 신용조건 완화뿐 아니라 중국과 인도가 성장 축으로 부상하면서 동반성장할 수 있었다. 신흥국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주가폭락과 경기침체를 경험했으나, 1997년 같은 위기를 겪진 않았다. 중국과 인도가 버팀목이었다.미·중 무역분쟁 장기화 조짐에 따른 중국 경기 둔화 가능성이 신흥국 경기 불안 우려를 키운다. 미·중 무역분쟁 강도가 완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 장기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과거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 경제상황을 참고할 만하다. 일본은 미국과 무역분쟁 결과로 엔화 평가절상에 합의했다(플라자 합의). 일본은 내수경제 모델 전환을 목표로 재정 정책과 통화 완화에 나섰다. 일본 경기가 플라자 합의 이후 2~3년 동안 호황을 구가한 배경이다. 신흥국 경기 경색 우려는 아직 이르다.
신흥국 환율변동성 확대로 신흥국과 미국 증시 간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도 디커플링 사례는 있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와 2013년 긴축발작 때다. 신흥국 위기가 1997년 재림이 아니라면 반등이 가능하다고 본다. 환율 고평가에 따른 투기자본 공격이 아니어도 6개 재정취약국의 펀더멘탈은 취약한 상태다. 신흥국 투자심리 회복을 위해서는 아르헨티나, 터키 등이 향후 내놓을 재정적자 축소 등 자구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전까지 신흥국 환율변동성 확대는 경계 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