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6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여의도·용산 통합개발계획을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여의도 재건축 단지 시범아파트 모습. [조영철 기자]
“여의도 도시계획은 전적으로 서울시장의 권한이다.” - 7월 26일 한 라디오 방송
“여의도·용산 마스터플랜 발표와 추진은 현재의 엄중한 부동산시장 상황을 고려해 주택시장이 안정화될 때까지 보류하겠다.” - 8월 26일 서울시청
40여 일 사이 한 사람 입에서 나온 말들이다. 발단은 싱가포르에서였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7월 10일 리콴유 세계도시상을 수상하고자 싱가포르를 방문한 자리에서 여의도 개발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서울역~용산역 구간 철로를 지하화하고, 철로가 있는 땅에 회의·관광·컨벤션·전시 등을 위한 마이스(MICE) 단지와 복합쇼핑센터 등을 짓겠다고 밝혔다.
서울시장의 말 한마디에 여의도·용산 집값은 즉각 반응했다. 집주인들은 호가를 억 단위로 올렸고, 매수자가 대거 몰려들어 한 달 사이 거래가 늘었다. 한국감정원 조사 결과 7월 셋째 주 여의도와 용산구 아파트값 상승률은 각각 0.23%, 0.26%로 서울시 평균 0.11%의 2배를 기록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국토부) 장관이 7월 23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서울시의 여의도·용산 통합개발은 도시계획적인 측면도 있지만 정비사업적으로 고려할 것이 많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밝히며 진화에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여의도·용산에서 출발한 집값 상승세는 서울 전역으로 확산돼 8월 말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여의도는 한동안 거래가 쉽지 않겠어요”
박 시장은 서울 전역의 집값 상승세가 자신의 여의도·용산 개발 발언과 관계없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7월 26일 한 라디오 방송에서도 계속해 여의도·용산 개발의 뜻을 확고히 밝혔다. 서울시 관계자 역시 7월 말 ‘주간동아’의 취재에서 “정부 부동산정책과 뜻을 같이하되 여의도·용산 개발은 서울시가 오랜 기간 검토해왔기 때문에 통합개발 마스터플랜은 자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하지만 8월 들어 서울시 태도가 달라졌다. 서울시 집값이 천장이 뚫린 것처럼 치솟았기 때문. 한국감정원 조사 결과 8월 셋째 주 서울시 아파트값 상승률은 0.37%로 직전 0.18%에 비해 2배가량 올랐다. 특히 용산구는 0.45%로 강북 14개 구 가운데 상승률이 가장 컸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박 시장은 8월 26일 서울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의도·용산 마스터플랜 발표와 추진은 주택시장이 안정화될 때까지 보류하겠다”며 싱가포르 발언을 철회했다.
부동산시장 관계자들은 박 시장에 대한 실망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8월 28일 여의도 시범아파트 인근 상가를 찾았다. 1층에 밀집한 공인중개사사무소 가운데 문을 연 곳은 절반에 불과했다. A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정말 허탈하다. 시장이라는 사람이 발언을 신중하게 해야지 애들 장난도 아니고, 한 달여 만에 보류하는 것이 정상이냐”며 반감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그는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전임 시장이 하던 여의도 개발사업도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비슷하게 한다고 발표한 거였다. 지금 여의도를 두고 개발계획만 몇 번 나왔다 들어갔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이렇게 난리니 앞으로는 더 믿을 수 없게 됐다”고 토로했다.
“용산은 통합개발 아니어도 호재 많아”
서울 용산구 이촌동 공인중개사사무소는 대부분 “여의도·용산 통합개발계획이 아니더라도 호재는 많다”는 분위기였다. 사진은 재건축 속도가 비교적 빠른 왕궁맨션 모습. [조영철 기자]
여의도 공인중개사사무소들의 분위기는 비슷했다. 관계자들은 허탈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매수·매도 모두 관망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C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시세에는 큰 변화가 없다. 분위기가 좋지 않지만 그래도 이참에 가격이 소폭 조정되면 매수하겠다고 문의해오는 분도 꽤 있다. 그에 비해 팔겠다는 사람이 없어 거래가 성사되지 않고 있다. 집주인도, 매수 희망자도 한동안 시장을 지켜보지 않을까 싶다”고 내다봤다.
용산은 여의도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같은 날 찾은 이촌동은 박 시장의 여의도·용산 개발 보류 발언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이촌동 래미안첼리투스 인근 D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박 시장이 용산을 지나는 철로를 지하로 넣고 공원과 쇼핑센터를 만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미 용산미군기지 이전과 공원화 사업이 예정돼 있고, 쇼핑센터도 용산역 혹은 강남권을 이용하면 되기에 딱히 부족함이 없다. 이쪽은 통합개발 보류를 아쉬워하는 분위기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재건축시장은 어떨까. 현재 이촌동에서 재건축 진행 속도가 가장 빠른 곳은 강변북로와 인접한 왕궁맨션이다. 1974년 지어진 왕궁맨션은 일대일 재건축을 추진하면서 도시계획위원회(도계위)에 아파트 층수를 기존 5층에서 35층으로 높이는 안을 제출했으나 6월과 7월 두 차례 보류된 바 있다. 당시 함께 안건으로 상정된 여의도 공작아파트는 하반기 여의도·용산 개발을 위한 마스터플랜 공개를 앞두고 심의가 보류됐다. 시장에서는 왕궁맨션도 그 일환으로 심의가 보류됐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왕궁맨션 인근 공인중개사사무소는 재건축 심의 통과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도계위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것은 서울시의 여의도·용산 개발계획과 관련성이 없다. 문제가 된 부분이 있는데 그것만 수정해 다시 올리면 무난하게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집주인들은 내년 말 이주계획이 나올 것으로 내다봐 매물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용산구 재건축은 개별적으로 사업 속도를 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재건축 아파트는 개별 단지의 입지를 보고 접근하는 것이지, 서울시의 개발안을 보고 접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촌동은 최근 1년 사이 재건축보다 일반아파트 가격이 더 많이 올랐다. 한가람아파트 전용면적 59㎡는 1년 만에 2배가 됐다. 재건축과 리모델링 단지는 오히려 저평가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이곳 주민들은 향후 미래가치를 지금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용산은 최근 발표된 정부 개발안에 따라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렵게 됐다. 8월 27일 국토부는 ‘수도권 주택공급 확대 추진 및 투기지역 지정 등을 통한 시장안정 기조 강화’를 발표하면서 서울 등 수도권 내 공공택지 14곳을 개발해 24만 가구 이상을 공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 그린벨트 지역과 함께 용산 유휴철도 대지가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다.
서울 한복판 용산에서도 한강변에 인접한 코레일(한국철도공사) 소유의 60만㎡ 땅에 임대주택을 공급하면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 한 인터넷 부동산 카페에는 ‘국제업무지구가 들어설 예정이던 자리에 임대주택이 세워진다면 반발이 클 것’ ‘강남을 꿈꾸던 용산이 임대주택으로 발이 묶인 꼴’ 등 부정적인 반응이 적잖게 올라왔다.
“비강남 경전철도 보류? 폭삭 망해”
비강남 경전철 사업 역시 국토교통부에서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밝혀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난곡선이 통과하는 서울 신림동 난곡사거리. [조영철 기자]
그런데 김현미 장관은 8월 27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경제부처 부별심사에 참석해 “서울시 경전철 사업 재정 전환은 국토부의 승인을 얻어야만 진행될 수 있다. 서울시 계획이 현실화되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비강남 경전철 사업은 당초 민자사업으로 계획됐지만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추진이 지연된 바 있다. 서울시는 이를 국가 재정 사업으로 바꾸기로 하고 사업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서울시의 각종 개발 호재로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정부가 속도 조절의 뜻을 내비친 것이다. 경전철 사업이 좌초된 것은 아니지만 정부가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밝힌 만큼 시일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8월 28일 경전철 난곡선이 들어설 예정인 관악구 신림동 난곡사거리 일대를 돌아봤다. 신대방역에서부터 난곡우체국 앞 사거리까지 4차선 도로만 이어져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시민은 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경전철 사업의 필요성이 실질적으로도 큰 지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곡사거리에 위치한 F공인중개사사무소에 경전철 사업 보류 소식 이후 반응을 묻자 “경전철이 안 들어온다고 하면 폭삭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허탈해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동네 사람들은 정부에서 도로 개발, 전철 개발한다고 하면 안 믿는다. 전에도 난곡 신교통수단 GRT(유도고속차량)를 한다고 해놓고 취소했다. 정부가 아니라 완전 양치기 소년이다. 여기는 개발 호재 때문에 집값이 들썩이는 동네가 아니다. 진짜 대중교통수단이 필요한 곳인데, 윗분들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며 정부에 반감을 드러냈다.
비교적 경전철 사업 호재 덕을 누렸던 목동선 인근 공인중개사사무소의 반응도 비슷했다. 양천구 신월동의 G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경전철 사업을 국토부에서 보류한다면 시장은 한동안 잠잠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지역 사람들은 경전철 사업이 7~10년가량 걸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외부에서 경전철 사업 호재 소식만 듣고 투자하려고 오는 사람이 상당히 늘어 집주인들이 매물을 거둬들이고 몇 달 사이 몇천만 원씩 집값이 올랐다. 이런 발표가 나오면 투자자 처지에서는 주춤할 수 있다. 그런데 집값이 문제가 아니다. 주민들은 교통이 너무 안 좋으니까 시일이 얼마나 걸리든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개발은 장기적 사업, 투기 수요는 진정될 것
전문가들은 박 시장의 여의도·용산 개발 발언이 서울시 집값을 올린 측면이 있지만 개발을 보류했다고 부동산시장 분위기가 급변하기는 힘들다고 전망했다. 이상우 유진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여의도·용산 개발은 원래 시간이 걸리는 사업이었다. 서울시장의 말 한마디에 들썩거리기는 했지만 ‘나중에 실제로 되고 봐야지’ 하는 분위기가 시장에 팽배해 있다. 여의도 개발 사정을 잘 모르는 투자 수요만 혹했던 측면이 있다. 지금 부동산시장은 그것과는 별개로 돌아가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고 분석했다.실제로 여의도 개별 아파트 재건축 사업은 역사가 길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 재임 시절에도 개발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오 전 시장은 2011년 여의도 11개 아파트 단지를 전략정비구역 개발로 땅의 용도를 상향조정하고, 70층 복합빌딩과 평균 40층 초고층 주상복합을 건설하는 내용의 ‘여의도 전략정비구역 통합개발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박 시장이 당선된 이후 개발계획은 모두 백지화됐다.
한 차례 아픔을 겪은 여의도 주민들은 이제 서울시의 개발계획에 대해 기대감을 접은 지 오래다. 오히려 개별 아파트 단지가 독립적으로 재건축을 추진하는 것을 더욱 선호한다. 실제로 여의도 서울, 공작, 수정 아파트 단지는 재건축을 개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들 단지는 상업지역 인근 단지로 용적률을 높일 수 있고, 층수 제한이 없어 고층 아파트 단지로 재건축이 가능하다. 여의도 한 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서울시의 통합개발계획에 발이 묶이는 것보다 개별 단지 조합원들끼리 속도감 있게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선호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여의도·용산 개발과 비강남 경전철 건설은 시일이 걸리지만 대승적으로 가야 하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이상우 애널리스트는 “서울시 도시개발은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다만 시장이나 정치인의 말 한마디가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10년 이상 걸리는 재건축 사업의 기간을 관련자의 말 한마디로 짧게 만들 수 있고, 미정이던 부분을 확정 지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번에는 개발이 보류됐지만 장기적으로는 계속 추진돼야 할 것이고, 그에 따라 부동산가격 상승 추세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