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다’라는 뜻의 한자어 ‘信’은 사람(人)의 말(言)이 곧 믿음의 시작임을 의미한다. ‘무엇을 언제까지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신뢰가 싹튼다. 국제관계에서도 지도자의 ‘말’이 ‘행동’으로 이어질 때 신뢰가 쌓인다. 구두 약속을 ‘합의서’ 또는 ‘보도문’으로 만들어 공표하는 것은 상황이 바뀌더라도 약속을 어기지 못하게 공신력을 높이려는 의도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핵’과 관련한 미국과 북한의 ‘약속’은 공수표와 다를 바 없었다. 구두 합의에 그치지 않고 주변 당사국이 이행보증에 합의해 문서를 남겼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북한의 6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 시험발사 등으로 한반도에 일촉즉발 전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1월 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장의 신년사를 계기로 남북 간 대화 물꼬가 터진 이후 두 달여 만에 남북정상회담은 물론, 북·미 정상회담 개최까지 합의하는 등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한반도에 평화의 봄기운이 움트고 있다.
1993년 북핵 위기가 처음 발생하고 25년 만에 미국과 북한의 정상이 만나면 양국 적대관계가 해소될 수 있을까. 일각에서는 정전협정 당사국인 미국과 북한 지도자가 최초로 만난다는 점에서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당장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안보 전문가들은 “급히 달아오른 쇠가 빨리 식듯 갑작스럽게 찾아든 북·미 대화 무드가 곧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4월 말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5월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개최된다 해도 회담에서 합의 수준에 따라 한반도가 평화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지난해보다 더 엄중한 군사적 충돌 위기로 치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미 정상회담 후 한반도 상황이 어떤 궤적을 그려갈지 크게 세 가지 예상 시나리오를 살펴봤다.
북핵 원샷 타결 시나리오
정의용 대북특별사절단 수석특사(가운데)가 3월 8일 오후 백악관 웨스트 윙 앞에서 도널드 트럼트 미국 대통령과 면담한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 제공·청와대]
따라서 5월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급물살을 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른바 일괄 타결, 원샷 비핵화 합의 가능성이 그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보관리실장을 지낸 김정봉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은 “남북, 북·미가 참여한 2005년 9·19 합의, 2007년 2·13, 10·3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북·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기존 합의를 이행하자고 약속하는 것만으로도 북한 비핵화의 일괄 타결 의미가 있다”고 전망했다. 김 전 소장은 “1994년 제네바합의에는 북핵 프로그램의 폐기와 그에 따른 보상 방안이 담겼고, 9·19 합의에는 대표부 개설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행동 대 행동 방안까지 들어 있다”며 “비핵화를 위한 프로세스는 이미 충분히 준비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미 정상이 첫 만남에서 북한 비핵화를 위한 구체적인 프로세스까지 모두 마무리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지금까지 적대정책을 전환하는 ‘평화선언’에 이를 수는 있다”고 내다봤다. 이른바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한 북·미 불가침 또는 종전 선언이 그것이다. 이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국제원자력기구(IAEA) 복귀로 연결돼 핵·미사일 폐기를 검증받고, 대북제재 완화와 남북 경제협력 논의 재개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이 같은 비핵화 프로세스의 종착역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북·미 국교 정상화다.
역순의 비핵화 프로세스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만나 협의할 내용도 북·미 정상회담에서 다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사전에 조율하는 기능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과 우리 측 의견을 김 위원장에게 충분히 전달함으로써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에 이를 여건과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이다.9·19 선언 이후 지금까지 통용돼온 북한 비핵화 로드맵은 한미연합훈련 중단과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을 전제로 한 북·미 양자회담, 또는 북핵 관련 당사국 간 다자회담을 통해 비핵화 프로세스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비핵화 1단계는 북한이 NPT와 IAEA에 복귀한 뒤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통해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국교를 정상화하는 수순을 밟는 것이었다. 이 같은 프로세스는 북핵 폐기를 목표로 단계별 비핵화 프로세스를 이행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남북과 북·미 정상회담이 잇달아 열리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논의됐던 단계별 비핵화 프로세스는 파격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북·미 정상이 만나 먼저 비핵화를 전제로 한 ‘평화협정’ 체결 등 큰 틀에서 합의한 뒤 후속 조치로 북핵 비핵화 단계를 밟아가는 역순의 비핵화 프로세스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북·미 평화협정이 비핵화 프로세스의 최종 단계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로 들어서는 첫 단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3월 14일 “그동안 제재를 완화하고 점층법으로 대화를 해왔지만, 지금은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없다”며 “여러 가지 복잡하게 꼬인 매듭을 생각한다면 (북핵 이슈를) 하나하나 푸는 게 아니라,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버리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단칼에 잘랐다는 전설에서 나온 말로, 한꺼번에 풀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를 뜻한다. 김정봉 전 소장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를 위한 일괄 합의를 큰 틀에서 이룬 뒤 이를 실무적으로 보완해가는 ‘톱다운 방식의 비핵화 프로세스’가 현실화될 개연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북·미 정상회담이 일괄 타결 없이 비핵화에 대한 서로의 이견만 확인한 채 소득 없이 끝난다면 한반도 정세는 지난해 말 상황으로 되돌아갈 공산이 크다. 대북제재 및 압박 강화와 군사옵션 사용 가능성이 고조돼 한반도에 더 짙은 전운이 감돌 수도 있다. 북핵 문제가 대두된 이후 몇 번의 합의에도 해결 실마리를 찾지 못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양국 간 신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정상회담이 북핵 해결의 출구로 가는 첫걸음이 아니라 자칫하면 파국으로 가는 초입이 될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ICBM 폐기와 대북제재 완화 맞교환 가능성
3월 5일 대북특별사절단과 마주 앉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장(오른쪽 가운데). [뉴시스]
특히 비핵화 개념을 두고 미국과 북한이 큰 입장 차를 보여 실제 양국 정상회담에서 이견이 표출될 개연성이 있다. 미국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완벽한 비핵화를 요구한다. 이는 북한 핵시설은 물론 핵물질, 이동 가능한 ICBM 같은 미사일까지 객관적인 방식으로 철저하고 투명하게 검증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미국이 요구하는 비핵화는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라는 점에서 김 위원장이 수용하려 하지 않을 개연성이 높다. 김 위원장은 핵보유국이라는 대등한 지위에서 미국과 협상에 임하려 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한 비핵화 요구에 북한은 ‘대북 적대정책 선 폐지-후 비핵화’ 프레임으로 맞설지 모른다. 즉 누가 먼저 신뢰를 보이는 행동에 나서느냐를 두고 양국 정상이 샅바싸움만 하다 정상회담이 결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김정봉 전 소장은 “북한은 핵보유국임을 강조하며 미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비핵화 협상을 하려고 들겠지만, 미국이 이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북·미 정상회담에는 갈등 요소가 잠복해 있다”고 전망했다.
어떤 경우든 완전한 비핵화로 나아가려면 ICBM 등 핵·미사일 폐기와 그에 대한 검증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과거 북한은 ‘군사시설’이라며 검증을 거부한 적이 적잖아 이번 비핵화 논의 과정에서 ‘검증 방식과 범위’를 합의하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봉영식 연세대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북·미 정상이 비핵화를 주제로 처음 만난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큰 진전이지만, 문제는 북·미 간 북핵과 미사일 폐기에 대한 입장 차가 커 양국 정상이 어느 정도 좁힐 수 있느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비핵화를 요구할 뿐 아니라, 비핵화를 이행하지 않으면 제재와 압박을 더 강화하겠다고 나올 수 있다. 그에 비해 김 위원장은 미국의 비핵화 요구에 따른 반대급부를 제시할 텐데, 어느 선에서 합의를 볼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비핵화에 대한 북·미의 동상이몽은 파국으로 흐를 수 있지만, 극적인 타결로 귀결될 개연성도 있다. 북한이 미국을 위협하는 ICBM의 고도화를 중단하고, 기존에 배치된 미사일을 제한하는 수준에서 비핵화 카드를 꺼내 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한 비핵화는 아니지만 미국의 처지를 고려한 협상카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즉 미국 본토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ICBM의 폐기와 그에 대한 검증을 북측이 제시할 경우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미국을 향한 북핵 위험을 제거한 것이 되므로 그 수준에서 협상을 타결하려 할 가능성도 있다. 봉 위원은 “미국은 동맹국 안전에 앞서 자국 안전을 우선시할 것”이라며 “김 위원장이 ‘선 ICBM 폐기-후 핵 폐기’를 제시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대화 결렬 상황이다. 전격적으로 성사된 북·미 정상회담이 순항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이 적잖기 때문이다. 북·미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뒤 미국에서 ‘온건파’인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전격 경질되고 ‘대북 강경파’인 마이클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후임으로 임명됐다는 점에서다. 폼페이오 내정자는 지난해 말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술 완성도를 볼 때 북핵 문제 해결 시한이 3개월여밖에 남지 않았다”며 선제타격 등 비상대책을 주문한 대표적인 대북 강경파다.
틸러슨 경질에 담긴 트럼프의 깊은 뜻
군사옵션으로 치닫던 북핵 문제가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대화로 실마리를 풀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상회담이 곧 문제 해결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화가 파국의 전주곡이 될 수도 있다. 한 국제문제 전문가는 “남북, 북·미 대화를 곧 문제 해결로 인식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고 “정상회담 때까지 군사옵션 카드가 현실화할 일은 없겠지만, 정상들이 만나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언제든 군사옵션 카드는 수면 위로 다시 올라올 수 있다”며 “남북, 북·미 정상회담 개최 합의로 북핵 문제가 곧 해결될 것으로 낙관하기는 이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