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동아DB]
그러나 아무리 유리한 구도를 갖추고, 인물 경쟁력을 확보했더라도 선거 표심을 뒤흔들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면 선거 양상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당에는 훈풍과 삭풍이 함께 불었다. 최근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미투(#Me Too)운동’은 6월 지방선거가 지금까지 선거 방정식과 무관하게 치러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대북특사 호재 뒤덮은 안희정 악재
3월 7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추미애 대표가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성폭행 파문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동아DB]
좋은 소식은 대북 특별사절단이 전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장이 비핵화 의지를 내비쳤다는 내용이다. 기대 이상의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늦은 밤이었지만 언론에 빨리 배포하려고 준비했을 것이다. 미국 현지시각으로는 낮이기도 했다. 밤사이 미국 언론에 먼저 보도가 나가고, 다음 날 아침 국내 언론이 그것을 받으면 더 좋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긍정적 신호를 보였다는 보도까지 나온다면 평창동계올림픽 기간 하향세를 보이던 문 대통령 지지율이 다시 반등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수행비서를 성폭행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친노무현 세력의 원조다. 문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날 서울 광화문광장 연단 위에서 볼에 뽀뽀까지 한 실세였다. 더욱이 더불어민주당의 차기 유력 대선후보이기도 했다. 이 나쁜 소식은 심지어 흥미롭기까지 했다. 반전 요소가 적잖게 담긴 탓이다. 첫째, 안희정 지사는 깨끗한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둘째, 진보 가치의 아이콘이었다. 셋째, 여성인권과 성평등을 누구보다 강조했다. 그런 그가 성폭행을 할 것이란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충격이 컸고 흡인력도 강력했다. 당연히 한반도 명운이 걸린 대북 특별사절단 관련 소식조차 묻힐 수밖에 없었다.
이틀 사이 세 차례 사과
청와대가 침묵에 잠긴 사이 더불어민주당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곧바로 긴급 최고위원회를 개최해 안 지사의 출당과 제명을 결정했다. 추미애 당대표는 피해자와 국민에게 사과했다. 이것으로도 충분치 않다고 느낀 추 대표는 이후로도 두 번 더 사과했다. 단일 사안으로 불과 이틀 사이 세 차례 사과한 것은 드문 경우다. 그만큼 이 사안이 갖는 파괴력이 크리라 판단한 것이다. 3월 7일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추 대표는 이렇게 언급했다. “지방선거 영향을 고려해 진실을 덮거나 외면하는 비겁한 정무적 판단을 일절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지방선거를 의식하지 않았다면 굳이 세 차례나 사과하지 않았을 것이다.바로 그날 페이스북에 사과문 하나만 던져놓고 잠적한 안희정 전 지사 측 소식이 전해졌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적 대응에 들어갔다는 내용과 더불어 첫 피해자 김지은 씨의 폭로 가운데 추가 피해자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피해자가 곧바로 추가 폭로에 나섰다. 상습적으로 다수를 가해했다는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데 공분이 일었다. 김씨의 첫 폭로 뒤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곧바로 철회해 거짓말 논란이 일었던 터에 또 다른 거짓말이 더해진 격이었다. 추 대표의 연속 사과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엎친 데 덮친 정봉주 사태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3월 7일 청와대 본관에서 여야 5당 대표와 오찬회동을 하고 있다. 대북 특별사절단의 방북 결과를 설명한 이날 회동에는 정의당 이정미 대표와 바른미래당 유승민 공동대표,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 민주평화당 조배숙 대표(왼쪽부터)가 참석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더불어민주당이 이렇게 초동진압에 힘쓰는 것은 미투 파문이 그만큼 치명적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과거 간헐적으로 터져 나온 정치권의 성추문은 대부분 보수 정당과 관련된 것이었다. 빈도도 낮고 해당 정치인의 개인 문제로 인식돼 탈당, 공천 탈락, 낙선 등으로 정리됐다. 안 전 지사의 경우에도 냉정하게 말하면 특정 정치인의 개별적 문제에 불과하다. 심지어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하지도 않는다. 평상시였다면 정 전 의원 사건도 공천 심사나 경선 과정에서 검증이 이뤄지도록 내버려둘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복당 자체를 허락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젠 과거와 다르다는 상황 인식이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촛불혁명을 계기로 국민의 주권의식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그것이 미투운동을 활발하게 만든 동력이 됐다. 미투운동은 결국 여성인권운동이고 전방위적이다. 모든 분야에서 폭로가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미투로 폭로된 인사 대부분이 여권 계열이다. 문 대통령의 경남고 동기동창이자 대선 때 방송 찬조 연설자였던 이윤택 연극 연출가가 대표적이다. 급기야 안 전 지사와 정 전 의원까지 포함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일각에서는 ‘이게 진보의 민낯’이라는 일반화까지 등장했다. 이런 일에 보수와 진보가 어디 있느냐고 항변해보지만, 아직까지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높은 기대가 더 큰 실망으로
진보 정권과 정당은 그동안 보수 정당에 비해 윤리적, 도덕적으로 뛰어나다고 주장해왔다. 국민도 기대가 큰 만큼, 동일한 사안에도 더 엄격한 잣대로 평가하려 한다. 그런데 안 전 지사의 사례는 이른바 죄질이 더 나쁘다. 일회적이 아닌 지속적이었고, 다수를 대상으로 했으며, 권력까지 동원한 경우이기 때문이다.사실 이번 일이 불거지기 전까지 분위기는 여당에 절대 유리했다. 큰 악재만 터지지 않고 후보만 잘 택한다면 싹쓸이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낙관론이 팽배했다. 그런데 의외의 악재가 터진 것이다. 물론 여당 내에서 낙관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국민이 안 전 지사와 문 대통령을 분리해 생각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따지고 보면 문 대통령은 최근 미투운동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이번 일이 불거지기 전인 2월 26일 오후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미투운동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피해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미투운동을 적극 지지한다”면서 “우선 사법당국은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호응해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야 할 것”이라며 적극 주문하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의 기대처럼 국민이 안 전 지사와 문 대통령을 분리해 판단한다면 지방선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끝날 수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에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지방선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지방선거가 임박한 시점에 이런 악재가 불거졌다면 손도 제대로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3개월이나 남았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다른 호재로 만회할 기회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미투운동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만약 보수 여당 쪽에서도 폭로가 잇따른다면 상당히 희석될 것으로 봐야 한다.
야당은 끝까지 웃을 수 있을까
요즘 가장 신이 난 사람이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다.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종횡무진 미투를 활용해 정부여당 때리기에 열심이다. 그는 3월 6일 자유한국당 제1회 여성대회에 참석했다. 행사 자체도 미투운동을 의식해 급조한 느낌이 드는 그 자리에서 홍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좀 더 가열차게 해서 좌파들이 더 많이 걸렸으면 좋겠다.” 화끈하게 미투운동 지지 선언을 한 것인데, 홍 대표가 끝까지 웃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홍 대표는 3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 오찬회동에서도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을 향해 “미투운동에도 무사하다”며 “안 전 지사 사건을 임 실장이 기획했다는 말이 돈다”고 언급한 것이 대표적이다. 논란이 일자 홍 대표는 농담이었다며 물러섰다. 하지만 이 발언은 의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진보 진영에서 돌고 있는 음모론을 의식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음모론을 처음 제기한 인물은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다. 대표적 진보 논객이자 방송인인 그는 2월 24일 팟캐스트 ‘김어준의 다스 뵈이다’에서 예언을 할까 한다며 공작 의혹을 제기했다. 진보 진영을 분열시킬 기회로 누군가 미투운동을 활용할 것이란 의혹 제기였다.
홍 대표의 공세가 앞으로도 약효를 유지하려면 자유한국당 내에서 성폭력 의혹이 불거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에도 되치기를 당할지 모른다.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이미 여러 차례 의혹을 제기했다 되치기를 당했다. 임종석 비서실장의 아랍에미리트 특사 파견 당시 원전게이트 의혹을 제기하며 청와대 항의 방문까지 단행했지만, 오히려 이명박 정부 시절 이면계약이 드러나면서 역풍을 맞았다. 평창동계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구성에도 반대했다 과거 한나라당이 집권당이던 시절 만든 특별법에 단일팀 구성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또다시 역풍을 맞기도 했다.
여의도에 수많은 안희정 있다?
안 전 지사 사건이 불거지자 자유한국당은 ‘순수 보수’라는 표현까지 들고 나왔다. 이번 지방선거는 ‘미투 가해 정권’과 ‘순수 보수 세력’의 대결이라는 것이다. 과거 온갖 성추문의 주역이던 자유한국당이 순수 보수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도 어울리지 않는 데다, 누가 봐도 반사이익에 기대려는 것으로 비쳐 이 표현에 대한 반응 역시 호의적이지 않다. 내부적으로는 우려의 시선도 없지 않다고 한다. 자유한국당 쪽에서도 줄줄이 성폭력 의혹이 불거져 이번에도 역풍을 맞을지 모른다는 걱정이다.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는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 “여야 전·현직을 망라해 여러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전여옥 전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의원 역시 방송에 출연해 “여의도에는 수많은 안희정이 있다”고 지적했다. 여당은 물론 야당에도 떨고 있는 사람이 적잖을 수 있는 것이다.승패와 무관하게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안희정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먼저 긍정적 효과로 과거 성폭력 전력을 적당히 뭉개고 출마하려던 이들이 포기할 개연성이 높아졌다. 더불어민주당은 3월 7일 추미애 대표 주재로 개최한 ‘전국윤리심판원-공직선거후보자검증위 연석회의’에서 성범죄 이력이 있거나 연루된 사실이 확인되면 공천 배제는 물론, 즉각 출당시키고 제명 조치도 내리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바른미래당 이학재 지방선거기획단장도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성범죄 연루자 공천 배제 방침을 밝혔다. 검찰에 기소되기만 해도 공천에서 배제하고, 가해자로 의혹이 제기된 상태라면 신중히 공천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서인지 몰라도 벌써 예비후보들에 대한 성폭력 폭로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부정적 효과는 미투운동에 편승한 흑색선전 또한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카더라’ 통신처럼 상대 후보의 성폭력 의혹을 입소문으로 퍼뜨리는 식이다. 이 경우 해명할 새도 없이 선거가 끝나버려 손해를 보는 후보가 적잖을 것이다. 물론 선거관리위원회가 철저히 감시하겠지만, 입소문인 경우 물증 확보에도 어려움이 많아 처벌이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