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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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정부에서 박정희 ‘평가’하자”

역대 정부 功過 사회적 합의 필요성 … 국가공론화위 활용도 방법

  • 이종훈 시사평론가 rheehoon@naver.com

    입력2017-11-21 17: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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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 위치한 박정희 전 대통령 흉상이 
빨간색 페인트로 훼손돼 있다.[뉴스1]

    서울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 위치한 박정희 전 대통령 흉상이 빨간색 페인트로 훼손돼 있다.[뉴스1]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하루 앞둔 11월 13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박정희기념도서관) 마당에서 한 차례 소란이 벌어졌다. 박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린 가운데, 찬반 양측이 격돌한 까닭이다. 찬성 측에서는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빨갱이, 북한으로나 가라!” 반대 측도 이에 질세라 이렇게 외쳤다. “친일파들, 너희나 일본으로 가라!” 보수 대 진보 대결이 이곳에서도 빚어진 것이다. 

    소란이 벌어진 현장인 박정희기념도서관의 설립을 결정한 이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이었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이미 박정희기념도서관 건립을 공약했고, 집권 이후인 99년부터 3년 동안 국고보조금 208억 원을 지원했다.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 일을 추진한 취지는 뭘까. 역사 화해 차원이었다. DJ는 누구보다 박 대통령 시절 정치적 박해를 많이 받은 인물이다. 73년 8월 8일 중앙정보부가 벌인 납치사건으로 사망 일보 직전까지 갔다 살아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박 전 대통령을 용서했다. 그로부터 20년이나 지났지만 진보-보수 진영의 진정한 화해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이 화해와 반대 방향으로 갔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의 후광 덕에 집권했다. 산업화 시대 고도성장을 이룬 상징적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박정희의 딸’이었기에 집권이 가능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제2 한강의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작용한 탓이다. 그러나 두 전직 대통령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나 있었을 법한 불법사찰과 정치탄압을 다시 불러들인 듯하다. 각종 지원을 배제한 ‘블랙리스트’와 특정 보수단체를 지원했다는 ‘화이트리스트’ 사건이 잇따라 드러나는 중이다.


    100% 대한민국

    박정희 동상 건립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11월 13일 동상 기증식이 열린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맞불 집회를 하고 있다.[동아DB]

    박정희 동상 건립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11월 13일 동상 기증식이 열린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맞불 집회를 하고 있다.[동아DB]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대표 시절인 2004년 8월 DJ를 방문해 아버지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 직접 사과까지 했던 터다. DJ의 용서에 사과로 화답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집권 여당이던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은 “뒤늦은 사과지만 환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로 덕담을 주고받았고 화해까지 했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은 아버지와 달라야 했다. 민주화 세대의 유산을 존중하면서 대선공약인 국민대통합에 적극 나서야 했다. “어느 정권도 이루지 못한 대통합의 100% 대한민국을 만들어가겠습니다”고 말한 그였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전 지지율은 5%였다(여론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95% 국민대통합을 이루긴 했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논두렁 시계’와 관련해 국가정보원(국정원)이 동원된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전직 대통령과 그 주변의 범죄를 규명하더라도 ‘논두렁에 시계를 버렸다’는 식으로 모욕을 줄 일은 아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일, 바로 그것이 진보 진영을 격앙케 한 결정적 계기였다. 이 전 대통령은 11월 12일 바레인 출국에 앞서, 최근 진행되고 있는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의 검찰수사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지나간 6개월 적폐청산이라는 명분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개혁이냐, 감정풀이냐, 정치적 보복이냐 이런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부정적인 것을 고치기 위해서 긍정적인 측면을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자신이 재임하던 시기에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부터 자성해볼 일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10월 16일 구속영장이 추가 발부되자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정치적 외풍과 여론의 압력에도 오직 헌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할 것이라는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더는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가 찍어졌으면 합니다.” 

    박 전 대통령의 딸이기에 더 잘할 것이란 기대를 안고 출발했지만, 그 끝은 아버지 못지않게 불운했다. 아버지 명예까지 회복할 수 있는 필생의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고 만 것이다. 

    이제 문재인 정부에서는 ‘적폐청산’이다. 수사 대상과 범위도 ‘역대급’이다. 보수 측에선 ‘정치보복’을 주장한다. 다음 보수 정부가 들어서서 또다시 ‘적폐청산’을 할 것인가. 이제 보수와 진보는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 머리를 맞대야 할 듯싶다. 누가 그 일을 시작할 것인가 바라건대 이번에는 보수 진영이 먼저 움직였으면 한다. 보수 정부 시절 벌어진 일들에 대해 사과부터 했으면 하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출당 조치를 마무리했다. 서청원, 최경환 두 친박(친박근혜)계 의원의 출당 문제도 논의 중이다. 이를 계기로 자유한국당도 변해야 한다. 먼저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낳은 정당으로서 국민과 진보 정당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 선거에 임박해 마지못해 하는 겉치레 큰절 말고 말이다. 물론 적폐청산을 정치보복으로 규정짓고 오히려 반발하는 자유한국당의 최근 행보로 봤을 때 실현 가능성이 낮아 보이긴 한다. 자유한국당이 그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보수 진영의 국가원로라도 나서야 한다. .

    쉽지는 않겠지만, 진보 진영과 더불어민주당이 대승적 관점에서 용서하고 넘어가는 방법도 있다. 이에 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일련의 적폐청산 수사가 끝난 뒤 박정희 정부를 비롯해 역대 보수 정부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해보자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평가는 산업화의 공(功)을 중시하는 시각이 존재하는 반면, 민주화를 억압한 과(過)에 집중하는 시각도 있다. 이번 기회에 공과를 객관적 시각으로 한번 정리해보자는 얘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교과서 등 대한민국 과거사, 특히 박 전 대통령의 공을 부각하려 노력했지만 객관성을 의심받았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진보 정부에서 하는 게 합리적이다. 이른바 ‘촛불’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시선과 여론을 과거 어느 정부보다 더 의식한다. 그만큼 ‘초록은 동색’이라는 비판을 피하면서도 비교적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 논란 최소화 방법

    ‘현대사 논란’을 줄이기 위해선 역대 정부를 평가해 종합보고서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다.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왼쪽부터).
[뉴스1,동아DB,뉴시스]

    ‘현대사 논란’을 줄이기 위해선 역대 정부를 평가해 종합보고서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다.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왼쪽부터). [뉴스1,동아DB,뉴시스]

    이런 방법은 또 어떨까 싶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긍정적 측면만 평가하고, 언젠가 보수 정부가 들어서면 그때는 DJ·노무현 정부의 긍정적 측면만 평가하는 것이다. 서로 인정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점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물론 역발상도 가능하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DJ·노무현 정부의 부정적 측면에 관한 평가보고서를 만든다. 그리고 다음 보수 정부에서는 이승만·박정희 정부의 부정적 측면을 평가보고서로 작성하는 식이다. 일종의 반성문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평가보고서 내용을 담아 종합보고서로 정리해두자. 100년 뒤 역사교과서의 현대사 부분 논란을 최소화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 중단 문제를 놓고 문재인 정부는 공론화 과정을 거쳤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보수 진영은 “내부적으로 중단 결론을 내려놓고 형식적 절차만 밟는 것이 아니냐”며 반발했다. ‘답정문’(답은 문재인 대통령의 의중대로 정해져 있다) 아니냐는 것이었다. 급하게 대선공약을 내놓았고 대통령이 돼 공약을 이행할 수 없으니 ‘출구전략’으로 공론화위원회를 활용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어쨌든 결론은 ‘건설 재개’였다.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론화위원회 운영의 경험을 토대로 ‘국가공론화위원회’를 만들려는 움직임이다. 더불어민주당 전해철 의원은 국가공론화위원회를 국무총리실 직속으로 설치하는 내용의 ‘국가공론화위 설립·운영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만약 국가공론화위원회가 출범한다면 이곳에서 박정희 정부를 비롯해 역대 정부들에 대한 평가 작업도 함께 진행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가공론화위원회에서 다룰 찬반이 엇갈리는 각종 국정 현안, 그 기저에 역대 정부 공과에 대한 보수와 진보 간 인식 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의 공과에 대한 사회적 합의 또는 양해가 이뤄진다면, 보수와 진보의 대결 강도도 크게 약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른 어떤 사안보다 먼저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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