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사이에는 믈라카해협이 있다. 해협 폭은 가장 좁은 곳이 2.8km에 불과하고 수심도 25m로 얕다. 믈라카라는 지명은 15세기 이 지역을 통치해온 이슬람 왕국의 이름이자 말레이시아 항구도시 믈라카에서 따왔다. 믈라카해협은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동서교역의 최단 항로다. 전 세계 해상 물동량의 20~25%, 중동지역 원유 중 50%가 이 해협을 통과한다. 이곳을 지나는 선박은 연간 8만여 척에 달한다. 그러다 보니 믈라카해협은 상선들을 노리는 해적이 가장 많이 출몰하는 곳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그동안 해적들을 소탕하고자 해군력을 강화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면서 말레이시아 정부는 국방 예산을 대폭 줄였다. 실제로 말레이시아의 올해 국방 예산은 36억 달러(약 4조700억 원)에 불과해 싱가포르의 100억 달러, 인도네시아의 82억 달러에 비해 크게 뒤처진다.
말레이시아는 그동안 미국과 군사협력 관계를 밀접하게 맺어왔다. 하지만 예산이 적다 보니 최근엔 미국산보다 싸고 차관 조건 등도 좋은 중국산 무기와 함정을 구매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산 연안 순시선 4척을 12억 링깃(약 3200억 원)에 도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말레이시아가 중국산 함정을 구매한 것은 처음이다.
미국산 대신 중국산 선택한 말레이시아·태국
중국 정부는 8월 시진핑 국가주석의 특사로 왕융 국무위원을 파견해 말레이시아 정부에 파격적인 조건으로 무기를 판매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왕 특사는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싱가포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남부 조호르 주에 중국의 레이더 시스템과 사거리 280km인 신형 다연장로켓 AR-3를 설치할 경우 50년 만기 장기 차관으로 무기를 판매하겠다고 제안했다. 조호르 주는 믈라카해협을 끼고 있는 군사 요충지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중국의 레이더 시스템과 AR-3를 배치할 경우 믈라카해협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를 감시하는 것도 가능하다.
중국은 말레이시아를 자국 편으로 끌어들여 믈라카해협의 안전을 확보하고 친미 국가인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를 간접 견제하려는 의도다. 나집 총리는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11월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는 시 주석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중국과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미국 법무부가 비자금 세탁 의혹과 관련해 나집 총리 측근을 기소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군사협력을 맺어온 태국 정부도 10월 9일 사상 처음으로 중국산 전차 VT4 28대를 도입했다. 태국 정부는 이 전차들을 북동부 콘깬 주에 주둔하는 제3기갑사단에 배치할 예정이다. VT4는 중국이 인민해방군의 99식 전차를 바탕으로 개발한 해외 수출용 3세대 전차다. 총중량 52t으로 1300마력 디젤엔진을 탑재했으며 승무원 3명이 탑승한다. 주포로 125mm 활강포를 채택하고, 원격 조작이 가능한 12.7mm 기관총과 7.62mm 동축 기관총을 장착하고 있다. 최고 시속 75km, 작전반경은 500km에 달한다. 태국은 앞으로 VT4 10대를 추가로 구매할 계획이다.
미국은 2014년 쿠데타로 태국에 군부 정권이 들어서자 원조와 군사협력을 중단하고 민정 복원과 인권 개선을 압박해왔다. 이에 맞서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는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중국의 무기를 도입하는 등 중국 정부와 군사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태국 해군은 5월 중국 국영 조선사 중국선박중공집단(CSIC)의 수출 자회사인 중국선박중공국제무역공사(CSOC)와 유안급 잠수함인 S26T 3척을 척당 135억 바트(약 4600억 원)에 구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태국 육군도 중국으로부터 VN-1 장갑차 34대를 사들일 계획이다. 태국과 중국은 지난해 5, 6월 육상과 해상에서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미국의 오랜 동맹인 필리핀은 지난해 6월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취임 이후 중국산 무기 도입에 나서고 있다. 필리핀은 5월 중국산 무기를 5억 달러(약 5600억 원)어치 구매했다. 이에 화답하듯 중국은 M-4 소총 3000정과 탄약 300만 발을 포함해 7300만 달러(약 825억 원)어치의 무기를 필리핀에 무상 제공했다. 양국의 군사 교류도 확대되고 있다. 중국 해군 군함이 4월 필리핀 항구에 기항했으며, 필리핀 해안경비대는 장교 20명을 중국에 파견해 군사훈련 교육을 받도록 했다. 심지어 친미 국가인 인도네시아도 지난해 중국산 해상 근접 방어 무기체계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저렴’ 내세운 중국에 ‘중고’ 들이민 일본
전통적 친중 국가인 캄보디아와 라오스, 미얀마 등도 중국으로부터 무기를 대거 도입해왔다. 중국과 미얀마 해군은 5월 사상 처음 벵골만과 인도양에서 연합훈련을 벌이기도 했다. 중국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중국산 무기는 가격은 저렴하면서 품질은 비교적 좋아 동남아국가들로부터 주목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홍콩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고립주의 정책으로 미국이 동남아에서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 틈새를 중국이 파고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동남아 각국 처지에서도 군사력 강화를 위해 저렴한 중국산 무기를 도입하는 것이 안성맞춤인 셈이다.
일본은 동남아 각국에 중고 무기와 장비를 무상 지원하면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 나섰다. 일본 정부는 의회의 협력 아래 자위대 무기와 장비를 외국에 무상 양도할 수 없도록 한 법을 개정했다. 일본 외무성은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 베트남 해양경찰과 필리핀 연안경비대에 순시선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베트남과 필리핀은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로 중국과 갈등을 빚어왔다. 아베 신조 총리의 지시로 일본 정부는 이미 베트남에 중고 연안순시선 6척을 지원했다. 일본 해상보안청과 베트남 해양경비대는 6월 베트남 중부도시 다낭 인근 해역에서 합동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또 필리핀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중고 순시선 12척 가운데 2척을 이미 양도했으며, 해상자위대 연습기 TC 90 1대도 무상 지원했다. 특히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중국 편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고자 공을 들이고 있다. 일본 정부는 말레이시아에 대형순시선 2척과 퇴역 대상 초계기 P-3C를 무상 제공할 계획이다. 중국과 일본은 앞으로도 동남아국가들을 대상으로 무기 제공 경쟁을 치열하게 벌일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