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HMS 로열 오크 함상에서 영국 해군 병사들이 럼주를 배급받고 있다. 위키피디아
전쟁터에서 살균제와 사기 진작 역할
역사 속에서 술은 유흥을 위한 도구 이상의 역할을 했다. 특히 근대 의학이 발전하기 전 전쟁터는 오염된 식수, 전염병, 부상으로 인한 감염증과 사투를 벌이는 공간이었다. 알코올은 강력한 살균제와 소독제로 기능했으며 안전하게 수분을 섭취할 수 있는 대안이기도 했다. 나아가 극도의 공포와 스트레스에 노출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으로 쓰였다.우리가 일상에서 소비하는 음료와 주류 상당수는 전장에서의 필요에 의해 발전했다. 세계적인 음료인 코카콜라가 대표적이다. 콜라는 프랑스 보르도 지역 와인에 코카잎 추출물을 첨가해 마시던 와인 칵테일 ‘빈 마리아니(Vin Mariani)’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이 미국으로 건너가 약사 존 펨버턴에 의해 모방됐고, 이후 금주법 시대를 거치면서 와인 성분 대신 탄산수와 시럽을 섞은 오늘날의 탄산음료로 재탄생해 군인들의 사기 충전용 보급품으로 전 세계에 확산됐다.
대영제국의 전 세계 식민지 확장과 군사 활동에 의해 탄생한 술도 존재한다. 바에서 널리 사랑받는 ‘진토닉(Gin and Tonic)’이 대표적이다. 진은 네덜란드에서 유래해 영국에서 대중화된 주류로, 주니퍼베리(노간주나무 열매)의 약효와 향을 추출해 만든 증류주다. 여기에 결합된 토닉은 본래 병사의 신체 상태나 신진대사 톤을 높여주는 자양강장제 약물이었다. 당시 영국 군대는 말라리아 예방 차원에서 특효약인 퀴닌을 의무적으로 복용해야 했으나, 맛이 너무 써 병사들이 복용을 거부하기 일쑤였다. 이를 해결하고자 독한 진에 퀴닌 성분이 든 토닉워터를 섞고 라임즙을 첨가해 마시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진토닉의 기원이다. 참고로 현재 국내에 유통되는 토닉워터는 수입 및 성분 규제로 약용 퀴닌 성분은 빠져 있다.
과거 국내에서 ‘캡틴큐’라는 상품명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던 럼(Rum) 역시 해적의 술로 오인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영국 해군의 공식 군용 술이었다. 사탕수수즙을 발효시킨 뒤 증류해 만드는 럼은 카리브해 식민지 개척 시절부터 해상 생활의 고단함과 괴혈병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필수 보급품이었다. 이 전통은 1970년대까지 지속돼 영국 해군의 주력 군용주로 자리를 지켰다.
유엔군은 맥주와 위스키 배급받을 때…

6·25전쟁 당시 한 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해병대를 위해 맥주를 옮기고 있다. GETTYIMAGES
정부는 전선 인근이나 후방 주조장들을 군납 양조장으로 지정해 군인들을 위한 막걸리와 소주를 조달했다. 특히 전쟁으로 전 국토의 곡물이 부족해지자, 정부는 국방부에 고순도 알코올인 주정(酒精)을 직접 배급하는 방식을 취했다. 각 부대에서는 이 주정에 물을 섞어 야전식 희석 소주를 만들어 장병들에게 나눠 줬다. 진급이나 전승 축하, 혹은 명절이나 국군의 날 같은 특수한 계기가 있을 때는 장성급 및 장교들을 대상으로 소주 또는 양주가 특별 보급 형태로 지급되기도 했다.
반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군수 시스템을 바탕으로 공식 배급품에 주류를 포함시켰다. 후방 보급기지와 일본을 통해 미국산 캔맥주가 대량으로 유입됐고, 전선 바로 뒤편에 있는 이동식 PX(군마트)나 함선 내 매점에서 장병들은 위스키와 맥주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야전 전투식량인 C-레이션의 일부 장교용 세트 등에는 담배와 함께 소량의 와인이나 위스키가 동봉돼 공급되기도 했다.
참호에서 군인들이 마셨던 술은 단순한 유흥 거리가 아니었다. 극심한 공포와 전장 소음, 불면증, 그리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마시는 소주 한 잔과 막걸리 한 사발은 병사들의 몸을 녹여줬다.
결과적으로 6·25전쟁기 주류 보급은 국군과 유엔군의 상반된 병참 능력을 보여주는 영역이었다. 국군은 전방 현지 양조장의 제한적인 조달과 정부의 주정 배급에 의존하며 고군분투했고, 유엔군은 본국과 일본 기지를 잇는 압도적인 병참 시스템 속에서 국군을 도왔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전선을 사수하고, 참호 속에서 술 한 잔으로 공포를 이겨내며 버텨낸 영웅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자유를 지키려다 전선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영웅의 헌신에 깊은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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