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2

2004.12.02

프리랜서 생활 경쟁력의 발견

  • 입력2004-11-26 1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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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랜서 생활 경쟁력의 발견
    넉넉한 원고료를 받고 연재하던 작업 하나를 1년 만에 정리하게 됐다. 애초 예상했던 기간만큼 일한 셈이지만 상당한 수입원이 뚝 끊긴 만큼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일하는 동안 돈을 모으기보단 씀씀이만 키워놓았기 때문이다. 큰돈이 들어가는 미술 수업을 등록한 데다 만만치 않은 가격의 겨울 코트도 할부로 마련하려던 참이었다.

    갑작스러운 수익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던 건 물론 아니다. 당장 필요한 품목에 정신없이 돈을 쓰면서 저축은 “쓸 만큼 쓰고도 남을 정도로” 벌게 될 언젠가로 미루었을 뿐이다. 프리랜서의 불안정한 처지라 미래를 치밀하게 준비하는 것이 아무래도 불리하다고 자기 합리화를 해보지만 지켜보던 이들은 하나같이 혀를 찬다.

    “빠져나간 만큼 곧 다른 일거리가 들어올 것”이라며 위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불규칙한 수입에 그토록 오래 시달려왔으면서 왜 늘 대책 없이 사느냐”며 잔소리해대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보일러까지 끊겨 엄동설한에 자다 죽을 일 없게 가스비부터 챙겨두라”며 겁주는 친구도 있다. 내 이름을 걸고 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은 마당에 얼어죽을 것을 걱정해야 한다니, 살아온 세월을 반성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좋은 작업을 만나는 운은 남달리 좋은 편인데도 돈을 관리하고 생활을 꾸려온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치스러운 취미가 있는 명품족도 아니지만 ‘쓰기 위해 번다’가 삶의 모토였다. 먹거나 사람 만나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부모에게서 독립해 자기 살림을 꾸려나가는 여성들이라면 대체로 나와 같이 불안하게 버티는 것 아닌가. 지인들의 사정을 새삼 짚어봤다.

    내 가계 경제에 대해 가장 걱정이 많은 이십년지기 갑순이. 입사 9년차의 외국계 금융회사 과장이다. 월급과 재테크로 1억원이 넘는 결혼 준비금을 가뿐히 모아두었다 한다. 안정적인 직장을 둔 데다 사정이 드물게 좋은 편이니 나의 비교 대상이 되기엔 부적절할 터. 을순이를 보자. 중국어 회화 강사인 그의 수입은 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몸에 밴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는 타의 모범이 될 정도다. 크게 돈이 드는 취미는 일체 경계하며 적은 돈이나마 꼬박꼬박 저축하고 있다.



    수입도 불안정하고 호사스럽기 이를 데 없는 병순이는 어떨까. 따로 사는 부모님이 자주 ‘삥을 뜯어’ 종종 생활의 곤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위기 때마다 기백만원씩 건네주는 남자친구들이 항상 곁에 있지 않나. 저축해놓은 돈도 없고 돈 드는 취미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데다 의지할 애인마저 없는, 나처럼 아무런 경쟁력도 갖추지 못한 싱글은 드문 것만 같다.

    참, 보험이 있긴 한데. 암보험도 달마다 붓고 강의하는 학교에 고용보험도 들어두었다. 하지만 그 알량한 액수를 듣자 시간강사인 선배 언니가 (울고 싶은 표정으로) 쏘아붙이더라.

    “왜, 그 돈 모아 약 사먹고 죽을 때 보태려고?”

    죽음을 궁리할 만큼 생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을 지경이면 하고 있는 공부를 그만두거나 부모님 집에 기어 들어가는 수가 있기는 하다. 악착같이 결혼해 남편의 벌이에 기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산만하고 불안정하더라도 나만의 자유로운 생활을 꾸려가는 맛을 알아버린 지금, 다시 우리 안으로 되돌아가는 선택은 명백한 항복이요 퇴행이다. 차라리 맞서 싸우다 장렬히 죽는 쪽이 아름답지! 눈앞의 카드대금 명세서와 빈 통장들을 기세 좋게 치우며 다짐한다. 겁 없이 풍족하게 써댔던 만큼 귀한 경험도 많았으니 그 기억과 돈을 아까워 말자. 찰나적인 쾌락에 투자했다고 욕먹어도 좋다. 문화예술 종사자로서 스스로를 단련하는 데 보탬이 될 정신적 자산으로 삼을 만하다. 재벌가 자제와의 8년간 결혼 경험을 밑천으로 귀부인 행세하려 든다고 비난받는 탤런트와 같은 처지가 되는 건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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