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7

2015.03.02

‘남장여자’ 이미지 뒤 천재 작가의 참모습

들라크루아가 그린 조르주 상드

  • 전원경 문화콘텐츠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5-03-02 10: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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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장여자’ 이미지 뒤 천재 작가의 참모습

    ‘조르주 상드의 초상’, 외젠 들라크루아, 1838년, 캔버스에 유채, 79×57cm, 덴마크 코펜하겐 오르드룹고르 박물관 소장.

    조르주 상드(1804~1876)라는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그의 소설을 읽은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들은 작곡가 쇼팽이나 시인 알프레드 뮈세의 연인으로, 아니면 남장을 하고 남자 이름을 필명으로 삼아 작품을 발표한, 기이한 여성 작가 정도로 상드를 기억할 것이다. 또 음악 애호가는 쇼팽을 지나치게 보호하고 구속함으로써 그의 날개를 꺾어버린 ‘치맛바람의 주인공’으로 상드를 인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오해에 가깝다. 상드는 19세기 중반 최고 수입을 올리던 인기 작가였다. 당시 프랑스에서 막 데뷔한 신인 작가는 소설 한 편에 1000프랑 내외의 고료를 받았는데, 상드가 단편 한 편당 받은 고료는 그 10배인 1만 프랑이었다. 그의 소설을 각색한 ‘사생아 프랑수아’라는 연극은 1849년부터 이듬해까지 프랑스에서 100번 이상 공연됐다. 1850년 파리지앵에게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설가를 한 명만 꼽아달라”고 요청했다면, 아마 대부분이 플로베르나 발자크보다 상드의 이름을 말했을 것이다. 그만큼 19세기 중반 프랑스 문단에서 상드의 위치는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상드는 20대 후반 발표한 ‘앵디아나’ ‘발랑틴’ 등을 비롯해 ‘밤의 마을’ ‘비일메르 후작’ 등 만년의 사회 소설에 이르기까지 60편이 넘는 소설과 희곡을 썼다. 1800년대 전반 유럽에서 활동한 동년배 어떤 여성 작가와 비교해도 상드만큼 큰 성공을 거둔 이는 없다.

    그가 오로르 뒤팽이라는 본명 대신 남자 이름 조르주 상드를 필명으로 쓴 건 당시 여성 작가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상드는 그리 ‘드센 여성’도, ‘치맛바람의 소유자’도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그는 남성 위주의 19세기 유럽 사회에서 당당히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쳐나가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했던 당찬 여성이었다.

    그보다 여섯 살 어린 쇼팽은 그런 상드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누리지 못했던 모성애를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쇼팽은 10대에 폐결핵으로 어머니를 잃었고, 자신도 폐결핵으로 서른아홉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쇼팽의 대표작 대부분은 상드와 동거하던 1838년부터 1847년 사이 완성됐다. 어찌 보면 상드는 쇼팽의 연인인 동시에 어머니, 경제적 보호자, 그리고 생명의 불꽃같은 존재였다.



    쇼팽과 상드의 친구였던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 ‘상드와 쇼팽의 초상’은 이들이 동거를 시작하던 1838년에 그린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하나의 캔버스에 두 사람의 초상을 함께 담을 계획으로 이 그림을 구상했다(‘주간동아’ 941호 참조).

    그러나 초상화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완성되지 못했다. 들라크루아는 쇼팽과 상드가 결별한 후에도 두 사람 모두와 우정을 이어나갔기 때문에 이 초상화가 미완성으로 남은 이유는 더더욱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초상화 속에서 상드는 ‘드센 남장여자’라는 소문과 달리 정숙한 귀족 부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손에 바느질감을 들고 연인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처럼 지나치게 순종적인 여성으로 묘사된 점이 상드의 불만을 산 건 아닐까. 예술가 중에는 자신의 초상화에 유난히 까다로운 이가 많고, 상드 역시 그랬을지 모른다.

    이 초상화가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는 점, 그리고 초상화가 둘로 쪼개져 각각 프랑스 파리와 덴마크 코펜하겐에 소장돼 있다는 점은 마치 두 연인의 슬픈 운명처럼 느껴진다. 상드와 헤어진 후 쇼팽은 채 2년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상드는 매몰차게도 친구들의 청을 뿌리치고 프랑스 파리 마들렌 성당에서 치러진 쇼팽의 장례식에 끝내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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