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라이선스권을 판매하며 창작 뮤지컬 세계 무대 도약의 신호탄을 쏜 ‘프랑켄슈타인’.
세월호 여파 가시지 않은 공연계
제때 작품이 완성되지 않아 다른 작품이 먼저 공연에 들어가거나 예정된 공연이 취소되는 경우는 왕왕 있었지만, 이런 현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것은 처음이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세월호 사고 이후 소비심리와 투자가 위축된 여파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바라봤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이 정도로 연쇄적으로 취소되고 바뀌는 건 처음 본다”며 “뮤지컬을 비롯해 음악, 영화, 게임, 드라마까지 모든 게 수많은 참가자 가운데 소수의 승자를 찾는 게임인데, 이제 뮤지컬계는 소수의 승자가 가져갈 게 별로 없는 시장이 됐다. 여러 면에서 승산 없는 게임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올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는 2016~ 2017년 공연 라인업이 잡혀 있는 상태이고, 샤롯데시어터, LG아트센터 등 인기 있는 공연장도 최소 1~2년치 공연 라인업을 미리 잡아둔다. 김선경 인터파크씨어터 홍보팀장은 “작품에 문제가 없어도 그 시기나 사회 분위기에 어울릴지 등 여러 환경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 이 밖에도 기획사 사정, 캐스팅 문제 등 여러 가지가 변수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조용신 CJ문화재단 크리에이티브마인즈 예술감독은 “국내에서는 장기공연이 어렵다 보니 한 번 공연이 끝나면 프로덕션은 유지되기 힘들지만 공연 의상, 소품 등은 창고에 남겨져 있다. 공연이 취소됐을 때 공연장을 비울 수는 없으니 다른 공연으로 대체하기를 원하는데, 아무래도 한 번 공연된 작품을 유치하게 된다. 기존에 출연한 배우들이 돌아올 가능성도 있고, 그 작품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관객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작품이 흥행해도 수익을 내기 힘든 뮤지컬 시장 구조도 이런 문제를 유발하는 원인으로 지적된다. 뮤지컬 전문지 ‘더 뮤지컬’의 나윤정 기자는 “뮤지컬 라인업을 조사할 때 보니 예년보다 올해 확실히 공연을 계획 중인 작품 수가 줄었다”고 말했다.
“순수 창작 뮤지컬보다 라이선스 작품을 가져왔을 때 네임밸류 때문에 더 흥행한다는 인식이 있어요. 국내 뮤지컬 시장의 문제는 이러한 네임밸류에 의존하다 보니 벌어지는 게 많습니다. 비싼 로열티를 주고 공연을 수입하거나 스타 캐스팅 등으로 제작비가 상승해 과당경쟁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뮤지컬 평론가인 최승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국내 뮤지컬 시장의 문제는 뮤지컬 마니아 중심의 작은 시장 규모, 수익 창출을 위한 무분별한 대형 기획의 난무, 뮤지컬 제작 노하우가 없는 신생 제작사, 선행 작품의 빚을 해결하기 위한 울며 겨자 먹기식 연쇄적 제작 풍토 등이 상호 연관을 주고받은 결과”라고 바라봤다.
“국내 뮤지컬 시장은 마니아의 반복 관람에 의해 유지되기에 위태롭죠. 시장이 작은데도 제작 노하우가 없는 신생 제작사가 빈번하게 탄생하고 또 조로 현상이 나타납니다. 급하게 수익을 창출하고자 작품 스타일에 맞지 않는 대극장을 섭외해 관객에게 실망감을 주기도 하고요. 제작사에서 발행하는 각종 할인쿠폰, ‘1+1’ 공연 티켓의 남발 등은 이런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세 달 반짝, 돈만 벌면 된다?
지난해 공연된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는 배우와 스태프의 출연료와 임금 미지급으로 당일 공연이 취소되는 사태를 빚었다.
수년 전까지 창작 뮤지컬 ‘아이 러브 유’가 장기공연을 하며 흥행했고, ‘김종욱 찾기’는 지금도 연인 관객의 데이트 단골 공연으로 꼽힌다. 그러나 창작 뮤지컬이 흥행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원 교수는 “국내 뮤지컬 시장은 성장통을 겪는 중”이라며 “2000석 가까이 되는 공연장에서 짧은 기간 안에 수익을 내길 원하니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려는 사람보다 짧은 기간 돈을 벌려는 장사치가 몰리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기금을 출현한 펀드조차 창작 뮤지컬 투자를 꺼리다 보니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두세 달 반짝 돈 버는 구조하에서는 유명 배우에게 매달리는 게 흥행하는 길이고, 그런 면이 뮤지컬계의 안정적인 성장을 방해하죠. 부족한 작품을 배우가 나와 완성할 게 아니라 그걸 극복하려는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등장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어요.”
창작 뮤지컬에 대한 투자가 원만히 이뤄지지 않는 한 흥행작이 나오더라도 남는 게 없을 거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조 예술감독은 “지금은 뮤지컬 시장의 과도기”라고 말했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는 연간 라인업 개념이 없어요. 한 작품을 쭉 공연하다 그게 망하면 그때 다른 작품을 찾아 올리거든요. 그러다 보니 공연을 선보이려는 경쟁도 치열하고, 트라이아웃 공연도 많이 이뤄집니다. 국내 시장은 브로드웨이처럼 관객층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극장들이 아무래도 연간 라인업을 짜는 등 보수적일 수밖에 없죠.”
투자자들이 투자를 꺼리는 이유는 딱 하나다. 돈이 안 될 것 같을 때, 그리고 작품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섭외된 배우의 티켓 파워가 부족하거나 라이선스 작품의 경우 원작자와의 계약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적신호가 들어온다. 어렵게 투자받아도 ‘대박’을 내는 건 1년에 한두 작품에 불과하다.
박병성 ‘더 뮤지컬’ 편집장은 “지난해 중견 제작사인 뮤지컬해븐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위기 분위기가 확산됐다. 그 여파가 올해 상반기 현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높은 캐스팅 비용과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다 보니 제작비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수익성은 낮아져 공연을 올려 제작사가 살아남는 게 힘들어졌다. 일련의 공연 취소와 교체 사태는 그것이 심해진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국가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부흥한 한국 영화를 예로 들면서 “창작 뮤지컬은 한정된 자본으로 흥행이 검증된 브로드웨이 대작과 경쟁하니 열악할 수밖에 없다. 어느 선까지는 창작 뮤지컬을 지원하고 경쟁에서 보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CJ문화재단 크리에이티브마인즈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본 공연을 올려 관객에게 사랑받은 창작 뮤지컬 ‘모비딕’(왼쪽). CJ문화재단에서 진행한 제4회 크리에이티브마인즈 뮤지컬 콘서트 ‘UNSUNG’. 2011년부터 매년 리딩 공연에 오른 작품의 넘버를 뮤지컬 콘서트로 구성해 신진 창작진의 작품을 시장에 다시 한 번 소개하는 공연이다.
김 홍보팀장은 “인터넷 인터파크 티켓에서 매년 뮤지컬 판매량 결산 데이터를 내는데 편수와 판매량은 늘고 있지만 점차 완만해지는 추세”라며 “‘쓰릴 미’ ‘여신님이 보고 계셔’ 같은 작품이 ‘회전문(같은 작품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보는 것) 관객’을 끌어모으는 건 사실이지만, 1000석 이상의 대극장을 뮤지컬 시장의 코어 팬인 2030 여성만으로 채우기는 힘들다. 새로운 유입층, 중·장년층도 극장을 찾을 수 있는 건강한 시장 개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에서 제작해 10억 원이 넘는 순수익을 거둔 창작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제작 당시 충무아트홀 측에서 창작자에게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작품은 라이선스작과 견줘도 손색없다는 평을 받으며, 각종 뮤지컬 어워즈에서 대상을 휩쓸었다. 최근 라이선스권이 일본에 판매되며 세계무대 진출의 신호탄을 쐈다. 최 교수는 “시장 규모를 해외로 확장해 수출할 수 있는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라이선스 뮤지컬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댄싱 섀도우’ 같은 선례가 보여주듯 ‘보편=서구’라는 인식만으로는 이러한 콘텐츠를 만들 수 없습니다. 민관이 주도하는 각종 지원 제도와 교육 시설이 탄탄하게 마련돼 국내 ‘뮤지컬 키드’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생겨나야 합니다. 차근차근 우리만의 제작 노하우를 쌓아 뮤지컬 구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들의 탄생이 제도적 차원에서 촉발돼야 할 것입니다.”
젊은 뮤지컬 창작자에게 기회 줘야
뮤지컬계의 화려한 이면에는 저작권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국내 순수 창작자들이 있다. 나 기자는 “특히 뮤지컬 작곡가는 대중음악 창작자와 비교했을 때 저작권 보호가 제대로 되지 않고 방치돼 있다. 그들 사이에서도 ‘투잡’을 뛰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작품 활동만으로는 생활하기가 어렵다. 재능 있는 창작자들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양질의 콘텐츠 생산을 돕고, 그를 통해 뮤지컬 시장이 선순환할 수 있는 제도 확립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원 교수는 “정부든, 정치권이든 직간접적으로 창작 뮤지컬을 지원해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한번 ‘터지면’ 더 많이 버는 건 창작 뮤지컬이거든요. 장기공연을 통해 흥행할 기회, 창작 뮤지컬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리스크가 큰 투자를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도 정부가 주도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걸 시장 자체에만 맡겨두면 아마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일 거예요.”
젊은 뮤지컬 창작자에게 ‘기회’를 주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는 CJ문화재단 크리에이티브마인즈와 두산아트센터의 두산 아트랩이 있다. 크리에이티브마인즈에서는 2010년부터 현재까지 32개 작품의 리딩 공연이 진행됐고 9개 작품은 본공연으로 관객을 만났다. 마니아들의 입소문을 타고 흥행한 ‘여신님이 보고 계셔’ ‘풍월주’ ‘모비딕’ 등이 여기서 빛을 본 작품들이다.
김모란 CJ문화재단 크리에이티브마인즈 담당은 “신진 뮤지컬 창작자에게 도전할 기회를 제공하는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으로 연극과 뮤지컬 분야를 나눠서 지원하고 있다. 선정된 작품은 전문가 멘토링을 통해 작품 개발을 돕고, 리딩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했다. CJ문화재단에서 5년째 젊은 창작자들을 만나고 있는 조 예술감독은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크리에이티브마인즈는 그 ‘처음’을 선사하는 프로그램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친구부터 40대 초반까지 비전과 실력이 있는 이들을 많이 만났는데, 이들에게서 1990~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계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뮤지컬은 지금보다 ‘나중에 잘될 것 같다’는 묘한 심리가 있는 장르예요. 미래가치가 현재가치보다 높다 보니 다들 업계를 떠나지 못하는 거죠. 춤과 노래가 있는 뮤지컬은 분명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장르일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업계 종사자 모두가 이익을 볼 만큼 매출이 생길지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에요. 앞으로도 내실 있는 중소형 작품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