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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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오자 철저히 외면 우리 사회 슬픈 자화상

카이스트 연쇄자살 사태

  •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의학박사 psysohn@chollian.net

    입력2011-04-18 1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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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오자 철저히 외면 우리 사회 슬픈 자화상
    카이스트에서 올해 들어 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월 전문계고 출신인 ‘로봇 영재’ A씨가 자살한 것을 시작으로, 2명의 과학고 출신과 1명의 영재학교 출신 학생이 잇따라 자살했다. 학생만이 아니다. 횡령의혹을 받던 교수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카이스트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최고 수재가 모인 카이스트에서 벌어진 이 비극적인 일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자, 현 대한민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무한 경쟁 중이다. TV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 역시 우리 사회의 경쟁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높은 곳으로만 가려 하고, 피라미드 맨 위층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무한 경쟁은 반드시 희생자를 필요로 한다. 그래야 판이 커지기 때문이다.

    성공한 소수는 전부를 독식한다. 나머지 들러리는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거나 성공한 사람들을 냉소한다. 학연, 지연, 뇌물, 행운 같은 요인이 가미된 불공정한 경쟁이 벌어진다면 그 결과를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힘이 없어 결과를 뒤집을 수도 없다. 무한 경쟁은 인간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괴롭힐 뿐이다. 승리한 자는 승리한 대로, 패배한 자는 패배한 대로 긴장과 좌절에 빠진다.

    특히 낙오자의 선택은 극단적이다. 자신이 낙오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은 듯한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자신은 결코 낙오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마음가짐이 컸던 사람일수록 실망과 좌절도 크다. 다시 힘을 내고 잠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마음보다 이제 끝이라는 마음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

    ‘긴장과 좌절’ 우리 사회 축소판



    그 결과 도피, 철수, 자해, 죽음 등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 실패했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심리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배제한 채 극단적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모습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낙오자를 배려하거나, 우울증 혹은 불안장애가 의심되는 사람에게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갈 것을 권하거나, 다음 기회에 도전하게끔 격려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제 너는 졌으니 그것에 맞게 살아라”라며 그를 더 큰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때 중요한 것은 낙오자와 함께 가려는 사회적 인식이다. “당신은 힘이 들고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우리와 함께 가자”며 보듬어야 하는 것이다.

    집단이나 조직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을 개인 특성 탓으로만 넘길 것인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책임이 없는가. 이번 카이스트 사태에서도 책임지려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서남표 총장은 교과 개혁을 주장하며 1인 시위를 하는 카이스트 학생과의 면담에서 “미국 명문대의 자살률은 더 높다”고 말했다. 상당히 비교육적이며, 망언 수준의 발언이다.

    낙오자 철저히 외면 우리 사회 슬픈 자화상

    카이스트는 4월 11일, 12일을 자살한 학생들에 대한 애도기간으로 정하고, 학과별로 교수와 학생 간 대화를 진행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제도 폐지 마땅

    그는 이번 학생들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도대체 최고 영재가 모인 학교에서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들의 지적 수준에 맞도록 꿈과 희망, 그리고 열정을 통해 학문을 가르쳐야지, 그저 점수만 따지는 공부 기계로 만들 셈이었던가. 마치 영업사원에게 판매 실적에 따라 차등 보수를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아니면 혹독한 훈련을 통해 살아남은 특수부대원만 나라를 지키게 만들려는 것처럼, 치열한 점수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학생만 국가의 산업발전 특수요원으로 만들려는 심산이었던가. 그래서 몇 명이 죽어나가든 대의를 위해서는 상관없다는 말인가. 기가 막힐 노릇이다.

    우리가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아무리 취지가 옳고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제도라면 폐기 처분해야 마땅하다. 학교를 운영하는 최고 결정권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사회 구성원 역시 방관자 처지에서 이번 사태를 좌시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똑똑하던 학생이 왜 죽었대? 공부를 더 잘하려고 하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거겠지. 그 학생들의 부모가 참으로 안됐다. 이 정도의 관심이 전부다. 아무도 교육 시스템의 개선과 사회적 분위기의 쇄신을 말하지 않는다. 이미 무기력해질 대로 무기력해진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죽은 학생의 친구들은 평소 그의 어려움을 몰랐을까. 그렇다면 가족은? 마지막에 자살한 학생은 자살 전날 우울증 진단서를 학교에 제출하고 휴학했다고 한다. 우울증 치료가 진작 이뤄졌다면 어땠을까. 우울증의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자신감이나 인생 목표의 상실, 이상적인 자아와 현실의 불일치, 만성 스트레스 등이 중요한 심리적 원인으로 지목된다. 고등학생 때까지 주변의 부러움과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자부심을 가졌건만, 대학에 들어오니 이제 더는 최고의 학생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카이스트의 향후 행보를 우리 사회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자. 남의 일이라 방관하기엔 그동안의 희생이 너무 컸고, 또 앞으로도 다시 생겨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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