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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고의 죽음 준비는 잘 사는 것”

‘천국 이사 도우미’ 김새별 유품정리사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최고의 죽음 준비는 잘 사는 것”

“최고의 죽음 준비는 잘 사는 것”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죽었다. 남이라면 모를까 가족이 고독사하거나 자살하거나 살해당한 현장을 직접 정리하기는 힘들다. 고인이 겪었을 일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대신 혈흔을 지우고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지운다. 우리는 천국으로의 이사를 돕는 사람들이다.”

유품정리사 김새별(40·사진) 씨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그렇게 정의를 내렸다. 23세부터 12년 동안 시신을 염습하는 장례지도사로도 일했던 그는 최근 삶의 의미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담은 책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을 펴냈다.

환영받지 못하는 일

▼ 20대 초반에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고교 때부터 ‘절친’으로 군 입대도 함께 했던 친구가 오토바이 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분이 친구의 몸을 정성스레 닦고 수의를 입히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고, 얼마 뒤 병원 영안실에서 직원을 구한다기에 지원했다. 지금은 ‘장례지도사’라는 국가자격증이 있고, 관련 업무를 대학에서도 가르치지만 당시엔 ‘염장이’라고 부르며 천시했다. 주위 사람들이 말렸지만 나는 절대 천시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일을 시작했고, 나중에 자격증도 받았다.”



▼ 장례지도사 일은 어땠나.

“처음부터 거부감이 없고 괜찮았다. 고인을 목욕시키고 옷을 입히고 나면 마음이 따듯해지고 편안해졌다. 고인의 가족한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시신에 화장을 해주고, 사고사한 경우 의료용 실과 바늘로 상처를 꿰매주기도 했다. 한 번은 염습이 끝난 할머니 모습을 보고 딸이 ‘우리 엄마가 아닌 것 같다’며 펑펑 울어서 ‘내가 뭘 잘못했나’ 더럭 겁이 났는데, 그분이 ‘우리 엄마가 참 예쁘다’고 하더라. 그때 보람을 느꼈다.”

▼ 장례지도사를 하다 유품정리를 하게 된 계기는.

“장례식 때 염습을 해준 분의 딸이 유품 정리를 도와달라고 했다. 장롱에 분리수거 딱지를 붙이고 나머지 유품을 쓰레기봉투에 담아 대문 밖에 내놓았더니 동네 사람들이 ‘재수 없게 죽은 사람 물건을 왜 길에 내놓느냐’며 화를 냈다. 이 사연을 인터넷 개인 블로그에 올렸더니 어떤 분이 쪽지를 보내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막막하고 눈물이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유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고, 한동안 장례지도사 일과 병행하다 2007년 회사(바이오해저드)를 세웠다.”

▼ 유품정리사를 ‘천국 이사를 돕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지만 실제 하는 일은 말처럼 아름답지 않을 것 같다.

“고인이 세상에 살았던 흔적을 모두 지우는 것이니, 사실 굉장히 우울하고 슬픈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세상에 꼭 필요한 일이다.”

▼ 유품 정리를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최고의 죽음 준비는 잘 사는 것”
“냄새다. 시신이 있었던 집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악취가 나는데, 그런 곳에서 장시간 일하면 냄새가 몸에 배 목욕을 해도 가시지 않을 정도다. 일하다 가게나 식당에 가면 쫓겨나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한테 욕을 듣고 소금과 물세례를 받기도 했다. 현장을 방치하면 동네 사람들이 악취와 해충에 시달릴 텐데 왜 우리 일을 터부시하는지 종종 서럽기도 하다. 누구한테도 환영받지 못하고 숨어서 해야 하는 일이라 힘들 때가 많다.”

▼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있나.

“방 안에서 목을 매고 자살한 젊은 남자의 유품을 수습했을 때다. 시신이 있던 자리에 남은 혈흔 등을 치우고 돌아서는데 침대에도 머리카락과 얼룩이 보였다. 이불을 들춰보니 아이 시신이 있던 흔적이 보이더라. 알고 보니 남자가 부인과 이혼한 뒤 네 살밖에 안 된 어린 딸을 목 졸라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거였다. 당시 또래였던 우리 딸이 생각나 너무 가슴 아프고 화가 났다. 처음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2주 동안 아예 일을 못 했고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갈등도 했다.”

힘든 순간은 반드시 지나가

▼ 좋은 기억도 있었다면 이야기해달라.

“유품을 정리하고 있는데 어떤 여자 분이 하얀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왔다. 옆집 이웃이었는데 고인의 죽음을 몰랐다며 미안한 마음에 왔다고 하더라. 처음 겪는 일이라 감동했다.”

▼ 수많은 죽음을 접했을 텐데, 좋은 죽음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누구나 죽으면 빈손으로 간다. 죽은 뒤 남는 건 생전에 가족과 함께한 아름다운 추억뿐인 것 같다. 한 번은 유학 간 딸이 걱정할까 봐 암을 숨긴 채 혼자 살다 돌아가신 분이 있었다. 딸이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통곡하더라. 병이 생기면 미리 가족에게 알리고 남은 시간을 충분히 의미 있게 쓰면 좋겠다. 또 사는 동안 아낌없이 쓰고 누려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유품을 정리하다 보면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물건이 쏟아져 나오는 집이 있다. 한 번은 고독사한 노인의 유품을 정리하다 전기장판 아래서 5만 원권 지폐가 무더기로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아들이 그것만 챙겨서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라. 결국 잘 사는 게 잘 죽는 방법 아닐까 싶다.”

광주가 고향인 김씨는 장례지도사가 되기 전 서울에서 고시원 생활을 하며 다단계판매, 주차도우미, 대리운전, 건설일용직노동 등 온갖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젊은 시절 늘 허기졌다”고 말하는 그가 지금은 직원 7명을 둔 사업체 대표로 전국의 범죄 현장, 화재 현장, 자살과 고독사 현장을 누빈다. 그는 “요즘 자살하는 젊은이가 많다. 많은 젊은이가 돈에 쪼들리다 사채에 손을 대고 결국 돌파구를 찾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힘든 순간은 반드시 지나가게 돼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아까운 나이에 삶을 포기하지 않을 텐데, 정부가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면 좋겠다”고 했다.



주간동아 2015.08.31 1003호 (p42~43)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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