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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6·25 발언’ 일파만파

타깃은 김무성, 대통령 신당 창당?

당내 경선 친박계 3연속 패배…새누리 “야권 희망 섞인 속내일 뿐”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타깃은 김무성, 대통령 신당 창당?

타깃은 김무성, 대통령 신당 창당?
‘박근혜 대통령의 최종 목표는 유승민 아닌 김무성 교체. 안정적 대중 기반 없는 김무성은 대체 가능하다고 생각. 완전한 ‘박근혜 정당’으로 만드는 것.’

새정치민주연합의 싱크탱크 ‘민주정책연구원’ 소속 이진복 연구위원이 7월 1일 작성한 ‘여권 파워게임 상황인식 및 대응’ 문건 내용 가운데 일부로, 여권 권력투쟁의 향후 전개 방향을 전망하고 있다. 문건이 공개된 뒤 정치권 일각에서는 ‘여권 분열을 바라는 야권의 희망 섞인 속내’라며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여야를 가리지 않고 “그럴 수 있다”는 공감을 표하는 이도 적잖았다. 특히 ‘박근혜 정당’ 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줬다. 역대 정권에서 임기 중반에 대통령 신당 창당이 마치 통과의례처럼 반복돼왔다는 점에서다(14쪽 상자기사 참조).

정치생명 연장의 꿈

역대 대통령 재임 중 대통령이 신당 창당을 주도한 역사가 되풀이돼온 것은 ‘구체제와 결별’을 통해 국정동력을 확보하려는 대통령의 현실적 이해와 총선 공천권을 주도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집권세력의 정치생명 연장의 꿈’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5년 단임 대통령 가운데 재임 중 신당 창당을 하지 않은 이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재임 중 두 차례 총선을 치른 이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재임 당시 상황은 유사한 점이 있다. 다른 점은 노 전 대통령이 취임 첫해 총선에서 여소야대로 고전한 데 반해, 이 전 대통령은 ‘친박(친박근혜) 학살 공천’에도 원내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함으로써 임기 초 안정적인 국정운영의 기반을 갖췄다는 점이다.



그러나 임기 말 치른 총선에서 현직 대통령이 철저히 배제됐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노태우 전 대통령 임기 5년 차에 실시된 1992년 총선은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대표 주도로 치렀고, 2012년 19대 총선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주도로 치렀다.

임기 말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에 반비례해 유력 차기주자에게는 힘 쏠림 현상이 나타난 것. 이숙현 시사칼럼니스트는 “임기 종료가 명확한 5년 단임 대통령제는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권력 누수가 생길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며 “권력의 힘이 빠지는 속도는 임기 중반으로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더욱 빨라진다”고 말했다.

권력 누수는 흔히 모래시계에 비유되곤 한다. 언제나 일정한 양의 모래가 빠져나가지만 처음에는 천천히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다 시간이 지나면 실제보다 더 많이, 더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다.

정치권에 오래 몸담아온 야권 한 인사는 “역대 대통령이 임기 중반 예외 없이 신당 창당에 나선 이유는 초조함 때문”이라며 “권력 누수를 막고 신당 창당을 명분 삼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새 인물을 충원해 국정운영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의도였다”고 평가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배신의 정치’를 언급하며 “국민이 투표로 심판해달라”고 호소한 것을 두고 역대 대통령의 신당 창당을 떠올리는 것은 정권마다 되풀이된 신당 창당사와 무관치 않다. 당장은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를 배신의 정치인으로 낙인찍어 찍어내기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민이 투표로 심판해달라”는 박 대통령의 언급 속에는 신당 창당의 복심이 감춰져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박 대통령이 6월 25일 국무회의에서 ‘배신의 정치’ ‘새 인물 충원’ ‘국민 심판’ 등의 키워드를 언급한 것은 그 자체로 신당 창당 가능성을 열어둔 의미가 있다”고 해석했다.

타깃은 김무성, 대통령 신당 창당?
선거 여왕의 마지막 승부수?

2004년 천막당사 시절 이후 2012년 12월 대통령 당선 직전까지 박근혜 대통령은 손대는 선거마다 승리를 몰고 다니는 ‘선거의 여왕’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한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박 대통령 취임 1년 4개월 만에 치른 전국선거인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남경필 경기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 권영진 대구시장 등 비박(비박근혜)계 소장파가 대거 당선했다. 이들은 원래부터 친박계가 아니었고 박 대통령의 도움 없이 당내 친박의 견제를 뚫고 자력으로 경선과 본선에서 승리를 쟁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때문에 이들은 ‘선거의 여왕’을 이을 차세대 ‘선거의 남왕’으로 성장할 재목으로 꼽힌다.

당내 선거에서도 친박계의 몰락은 뚜렷했다. 지난해 5월 국회의장 경선에서 친박계 황우여 당시 대표가 비박계 정의화 의장에게 패했고, 같은 해 7월 치른 전당대회에서도 친박계 서청원 최고위원이 비박계 김무성 대표에게 무릎을 꿇었다. 올해 2월 원내대표 경선에서도 새누리당 의원들은 박심(朴心)을 등에 업은 이주영 의원을 외면하고 원조 친박에서 일찌감치 탈박(脫朴)한 비박계 유승민 원내대표를 선택했다. 최근 1년 동안 당내 경선 등에서 친박 3연패가 현실화한 것이다. 이 같은 당내 선거 결과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친박계가 느낄 ‘공천 학살’에 대한 공포를 배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김무성 대표 주도로 치른 4·29 재·보궐선거(재보선) 당시 수도권에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김 대표조차 ‘선거의 남왕’ 반열에 올랐다. 4·29 재보선 이후 새누리당에는 낮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중심으로 모이고, 밤에는 김무성 대표에게 줄을 선다는 이른바 ‘주박야김(晝朴夜金)’ 현상까지 나타났다(‘주간동아’ 990호 참조).

임기 반환점도 돌지 않은 박 대통령에게 벌써부터 당내에서 들려오는 주박야김 얘기는 곧 레임덕을 의미한다. 박 대통령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친박계를 구하려 ‘배신의 정치’ 응징에 직접 나섰다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배신의 정치’ 응징에 나선 박 대통령의 시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여론은 박 대통령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못하다.

- ‘메르스 사령관’을 갈구한 국민적 요구와 달리 ‘친박 사령관’을 자임한 박근혜 대통령의 ‘민생이탈 화법’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

- ‘유승민 죽이기’ 국무회의가 아니라 ‘민생 살리기’ 국무회의를 원한 국민의 요구 철저히 외면.

- 국무회의에서 ‘메르스 전쟁 보고서’를 낭독했다면 국민과 세계가 신뢰했을 텐데 ‘유승민 배신 보고서’를 읽으니 국제적 신뢰 추락.

(‘여권 파워게임 상황인식 및 대응’ 보고서 중 일부)

야당에서 작성한 보고서라는 점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다수 국민이 이 같은 보고서 내용에 공감하고, 서로에게 전달하며, 전폭적인 공감을 표하는 현실을 박 대통령과 친박계 인사들은 직시할 필요가 있다.

국민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 정권은 재임 중 바로 서지 못하는 것은 물론, 다음도 기약할 수 없는 법이다.

대통령 신당 창당은 5년 단임 대통령의 필수코스?

타깃은 김무성, 대통령 신당 창당?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로 대통령 권력구조가 바뀐 1987년 이후 대통령에 오른 역대 대통령은 임기 중반 총선 같은 전국선거를 앞두고 ‘신당’을 창당했다. 신당 창당을 통해 집권을 위해 불가피하게 손잡았던 세력과 결별하고,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할 참신한 새 인물을 전면에 앞세워 국정운영 동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임기 3년 차를 맞이한 1990년 초 자신이 총재로 있던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등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했다. 노 전 대통령의 민자당 창당은 임기 후반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한 ‘비상조치’적 성격이 강했다. 취임 두 달 만에 치른 88년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노 전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야권에 뺏겼다. 임기 초부터 되는 것은 없고 안 되는 일이 더 많다고 해 ‘물태우’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절 대통령 정무수석을 역임한 이원종 전 수석은 최근 펴낸 책 ‘국민이 만든 대한민국’(메디치)에서 당시 여소야대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여소야대로 형성된 13대 국회에서는 과거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대통령이 제출한 정기승 대법원장의 임명동의안이 여야 간의 심각한 입장 차이로 사법사상 최초로 부결된 것이다. 또한 야 3당이 공동으로 제안한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안’과 ‘국회에서의 증언, 감정 등에 관한 법률’이 야 3당에 의해 통과되었다.’

‘정치야합’이란 비난에도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김영삼, 김종필 두 야당 지도자와 손잡고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을 창당한 노 전 대통령은 이후 사회주의권 붕괴와 탈냉전의 시대 상황에 발맞춰 북방외교를 힘 있게 추진해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태우’에서 임기 후반 북방외교로 대통령의 성과를 챙길 수 있었던 배경에 민자당 창당이 뒷심으로 작용한 셈이다.

김영삼(YS) 전 대통령 역시 재임 중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3당 합당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한 YS는 임기 3년 차이던 1995년 ‘역사바로세우기’를 계기로 구시대 인물로 여겨지던 3당 합당의 두 축인 민정계, 공화계와 공식 결별했다. 이후 96년 총선을 앞두고 YS 자신을 정점으로 새 인물을 대거 영입,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이재오 의원 등이 YS의 신한국당 창당에 발맞춰 국회에 입성한 이들이다.

김대중(DJ) 전 대통령 역시 집권 3년 차에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다. DJ는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으로 집권에 성공했지만 외연 확대를 명분으로 한 독자적인 신당 창당을 계기로 JP(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와 결별한다. ‘젊은 피 수혈’을 통해 원내 과반 의석 확보에 나섰지만, 2000년 4월 총선에서 원내 제2당에 머물면서 집권 기반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은 결별한 자유민주연합이 원내교섭단체 구성 요건인 20석을 확보하지 못하자 ‘의원 꿔주기’를 하면서까지 DJP 연합의 명맥을 이어갔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절 이뤄진 열린우리당 창당은 역대 정권의 대통령 주도 창당과는 궤를 달리한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세 대통령이 집권당 총재 자격으로 신당 창당을 주도했다면, 열린우리당 창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묵인 하에 참여정부 핵심 실세 3인방이던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등 이른바 ‘천신정’이 창당을 주도했기 때문. 그러나 대통령을 등에 업고 정권 실세들이 신당 창당에 나섰다는 점에서 대통령 재임 중 창당의 역사를 이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주간동아 2015.07.06 995호 (p12~14)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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