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2

2014.11.10

굿바이! 아방가르드 음악 해설사

독일 지휘자 미하엘 길렌 은퇴

  • 황장원 음악칼럼니스트 tris727@naver.com

    입력2014-11-10 10: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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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바이! 아방가르드 음악 해설사

    최근 은퇴를 선언한 독일 지휘자 미하엘 길렌.

    어느덧 2014년도 두 달이 채 안 남았다. 과연 2014년은 어떤 한 해로 기억될까. 적어도 클래식 음악 애호가에게는 ‘크나큰 상실의 해’로 기억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거장 지휘자들과의 이별이 아팠던 해로 말이다.

    새해가 밝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7월에는 과거 아바도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던 미국 지휘자 로린 마젤이 타계했다. 그로부터 꼭 한 달 뒤엔 네덜란드 지휘자 겸 리코더 주자 프란스 브뤼헌이, 9월에는 영국 지휘자 겸 건반악기 주자 크리스토퍼 호그우드가 이 세상을 떠났다.

    그중 이 지면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브뤼헌과 호그우드는 20세기 후반 이른바 ‘역사주의 연주’ 경향을 주도한 선구자적 거장들이었기에 고음악 애호가의 상실감이 실로 컸다. 더구나 두 사람은 조만간 내한공연이 예정돼 있던 터라 아쉬움이 더 진하게 남았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명의 거장이 우리 곁을 떠나간다. 10월 말 독일 지휘자 미하엘 길렌이 건강상 이유로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그나마 타계 소식이 아닌 것은 다행이라 하겠지만, 길렌은 내한한 적도 없기에 그를 흠모해왔던 마니아의 상실감은 막대할 수밖에 없으리라.

    1927년생인 길렌은 드레스덴에서 태어났지만 성장기는 남미에서 보냈다. 그의 부모가 나치 정권을 피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길렌은 거기서 음악계에 투신해 수련을 쌓는 한편, 3세 연하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교분을 맺기도 했다.



    성인이 돼 유럽으로 복귀한 길렌은 빈에서 공부한 후 그곳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지휘자로 데뷔했고 스톡홀름, 브뤼셀, 암스테르담 등지에서 경력을 쌓은 후 1977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의 극장장 겸 총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바야흐로 ‘길렌 시대’의 막이 올랐고, 그는 그곳에서 10년 가까이 머무르며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을 독일 굴지의 극장으로 격상시켰다.

    이후 길렌은 미국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 독일 바덴바덴의 남서독일방송교향악단 등 최고는 아니지만 탄탄한 기량과 진취적 패기를 갖춘 제2선의 악단들을 이끌며 독자적인 영역과 입지를 구축했다.

    작곡도 했던 길렌은 특히 현대음악 전문가로 명망이 높았다. 1965년 쾰른에서 현대 오페라의 대걸작인 치머만의 ‘병사들’을 초연한 것을 비롯해 라헨만, 리게티, 슈토크하우젠 등이 작곡한 20세기 걸작 다수를 초연하고 아방가르드 음악의 최고 해석가로 군림했다.

    국내에 길렌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0년대 후반, 남서독일방송교향악단과 녹음한 음반들이 정식 수입되면서부터다. 그의 베토벤과 말러 연주는 애호가 사이에서 강렬한 충격파를 일으켰고, 이후 그의 근현대음악 음반이라면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하는 마니아층도 생겨났다. 지금도 그의 말러, 쇤베르크, 버르토크 연주는 정상급 명연으로 통한다.

    필자는 2011년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단 한 번 길렌의 실연을 접한 적이 있다. 냉철하고 분석적인 해석으로 유명한 길렌의 실체는 음반에서 접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지휘한 말러 ‘교향곡 1번’은 베일 것처럼 예리했고 얼음폭풍처럼 냉엄했다. 그 서늘하고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마지막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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