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6

2014.05.07

죽느냐, 사느냐… 궁궐의 암투

이재규 감독의 ‘역린’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4-05-07 11: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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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느냐, 사느냐… 궁궐의 암투
    영화 ‘역린’(감독 이재규)이 피와 음모, 배신, 탐욕으로 얼룩진 날로 묘사하는 1777년 7월 28일. 조선 왕궁의 길고 긴 24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지막에 이르는 것은 지덕체(知德體)가 완벽하게 합일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군왕의 나라다. 130분간 스크린에 펼쳐지는 피와 죽음의 드라마 끝에 당도한 그곳에서 서사로 수없이 반복하고 역사가 끝없이 배반해온 한국인의 열망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개인 욕망과 콤플렉스를 뛰어넘고, 이해와 탐욕으로 갈라선 무리를 논쟁과 지략으로 돌파하며, 약자를 근심과 연민으로 감싸 안는 통치자. 결국은 우리가 열렬히 희구해온 이상적 지도자 말이다.

    ‘역린’은 왕위에 등극한 지 1년 된, 불안하고 위태하기만 한 집권 초기 정조가 반대파 노론의 반정 및 암살 음모에 처한 긴박했던 24시간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에 담긴 시간은 단 하루지만, 정조와 그를 없애려는 노론 벽파의 권력투쟁을 축으로 다양한 인물 군상의 드라마가 그려진다. 집권 1년 차 정조는 궁궐에서 고립무원이다. ‘할마마마’ 정순왕후(한지민 분)가 군왕인 손자를 고꾸라뜨리려고 시도 때도 없이 이와 발톱을 드러내고, 정순왕후를 등에 업은 노론 벽파가 경제권과 군권을 모두 장악한 채 왕위마저 찬탈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정조 편엔 단 두 명, 왕의 서가를 담당하는 내시 상책(정재영 분)과 호위부대 금위영의 대장 홍국영(박성웅 분)뿐이다. 정순왕후와 노론 세력이 반정과 암살 음모를 꾸미는 동안, 정조의 분신이나 다름없던 상책이 괴이하고 수상한 행동으로 홍국영의 감시에 걸려든다. 정조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면초가 처지가 된다. 정순왕후는 노골적으로 정조에게 경고를 보내고, 노론은 인간병기를 ‘사육’하는 비밀조직의 하수 광백(조재현 분)을 통해 왕의 목을 칠 자(조정석 분)를 골라내 은밀한 임무를 맡긴다.

    죽느냐, 사느냐… 궁궐의 암투
    ‘역린’에서 모든 인물은 자신에게 주어진 ‘공적’ 숙명과 사사로운 감정 사이에서 끊임없는 선택과 결단의 기로에 놓인다. 누군가를 살리거나 죽여야 생존할 수 있는 게 그들의 운명이지만 형제, 친구, 부자, 모자, 연인, 군신 등 사사로운 관계에서 비롯한 인간적 감정은 칼과 독배를 쥔 그들의 손을 자꾸 머뭇거리게 만든다. 정치적으로는 개혁 군주와 보수 신권이 대척점을 만들고 인간적으로는 이타심과 이기심이 팽팽한 대칭을 이룬다. 누가 누구에게 칼을 겨누고 독배를 들이밀 것인가. 시시각각 펼쳐지는 팽팽한 드라마가 ‘역린’의 미덕이다.

    ‘역린’은 시작하자마자 현빈의 잘 발달한 등과 어깨선, 근육을 탐하듯 담아낸다. 구중궁궐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왕의 침실에서 상의를 벗고 땀 흘리며 팔굽혀펴기를 하는 왕. 곤룡포 속에 선명하게 분할된 복근을 감춘 청년 군주. 그리하여 다난하고 복잡한 인물관계도가 빚어내는 드라마는 결국 세상에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육체를 가졌으며, 누구보다도 따뜻한 가슴을 간직하고 있고, 그것을 넘어 용의주도한 전략과 지성, 그리고 누구라도 벨 수 있는 전투 능력을 소유한 인물, 현빈의 정조를 완성하는 데 온전히 바쳐진다. 현실에 없어 더욱 간절한, 지혜롭고 헌신적이며 정의로운 영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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