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0

2013.10.28

“겨우 2500만 명도 굶기나”…후진타오 訪中 김정일에 돌직구

김정일 생애 여덟 차례 중국 방문…매번 언론과 숨바꼭질 ‘비밀 드라마’

  • 김승재 YTN 기자·전 베이징 특파원 sjkim@ytn.co.kr

    입력2013-10-28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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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우 2500만 명도 굶기나”…후진타오 訪中 김정일에 돌직구

    단둥의 한 호텔에서 내려다본 ‘중조우의교’ 전경. 멀리 보이는 도시가 북한 신의주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중국 주재 한국 언론 특파원에게 가장 큰 이슈는 당연히 그의 방중(訪中)이었다.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하는 데다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끄는 뉴스이다 보니 특파원에게 가장 큰 고통과 스트레스를 주는 사안이기도 했다. ‘제발 내 임기만 피해서 오길…’ 하는 게 특파원 대부분의 공통된 소원(?)이었다.

    그런 ‘김정일 방중 사태’를 필자는 네 차례나 겪었다. 김 전 위원장의 생애 여덟 차례 방중 가운데 절반에 해당한다. 당연히 얽힌 사연도 많다. 취재 과정에 부끄러움도, 뿌듯함도 있었다. 이번 호에는 먼저 필자가 겪은 첫 번째 취재기를 싣는다. 당시 북·중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김 위원장을 질타했고, 이에 격분한 김 위원장이 조기 귀환하게 된 사연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밤새 뻗치기 ‘단둥 애환’

    특파원 부임 갓 두 달을 맞은 2010년 3월 말 필자는 북·중 접경 도시인 랴오닝성 단둥에 있었다.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 북한 동향 파악과 함께 중국 방문이 임박했다는 김 위원장의 전용열차 취재를 위해서였다. 압록강 너머 신의주가 내려다보이는 단둥의 한 호텔은 한국과 일본 등에서 온 외신기자들로 버글버글했다. 이 호텔은 김 위원장 방중 같은 이슈가 터질 때마다 외신기자들이 단골로 찾는 숙소다. 단둥시와 호텔들 처지에서는 이때가 성수기로, 기자들에게는 방값도 비싸게 받았다. 따지고 보면 전 세계를 상대로 단둥을 공짜로 홍보해주는 셈 아닌가. 단둥시와 호텔 측은 북한에 감사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겨우 2500만 명도 굶기나”…후진타오 訪中 김정일에 돌직구

    압록강변에 자리한 중국 단둥의 한 호텔. 북한 최고지도자의 방중 소식이 있을 때마다 외신기자들로 붐비는 곳이다.

    김 위원장의 방중이 임박할 때면 밤마다 펼쳐지는 진풍경이 있다. 신의주가 보이는 방향의 호텔 창문으로 카메라 렌즈가 즐비하게 나온다. 방송과 신문 등 각 언론사의 카메라들이다. 단둥으로 언제 들어올지 모를 김 위원장의 전용열차를 촬영하려고 설치해놓은 것이다. 전용열차는 보통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 조용히 들어온다. 그래서 호텔에 있어도 기자들은 밤에 제대로 눈을 붙일 수 없다.



    한국 방송사 특파원들은 회사와 상관없이 보통 시간대별로 조를 짜서 불침번을 서며 ‘뻗치기’를 한다. 이는 한국 방송사에서만 볼 수 있는 협업 시스템이다.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 언론은 모두 개별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런 협업을 거의 하지 않는다(일본 언론이 협업 취재를 할 때는 취재 대상이 인위적으로 취재 언론사 수를 제한하는 경우 등 극히 한정적이다). 이 때문에 일본 기자들은 한국 언론의 이런 시스템을 부러워하곤 했다. 사실 이런 식의 협업이란 인원과 장비가 일본 언론에 비해 빈약한 한국 방송사들의 현실이 반영된 결과물일 뿐인데도 말이다.

    단둥에서의 첫날 밤, 필자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이때는 아직 한국 방송사끼리 협업 시스템이 가동되기 전이었다. 신의주와 단둥을 잇는 ‘중조우의교’(중국과 북한 간 우정의 다리라는 뜻)를 수시로 내다봤다. 양쪽을 오가는 열차가 경적을 울려댔다. 경적 소리에 침대에서 후닥닥 일어났다가 김 위원장의 전용열차가 아닌 걸 확인하고는 침대에 다시 눕기를 수십 차례. 다른 언론사 기자들의 분주한 움직임에 화들짝 놀라 창문으로 달려간 적도 부지기수였다. 열차는 한 번 지나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놓쳐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과 긴장감에 자는 둥 마는 둥 첫날 밤을 지새웠다.

    당시 필자는 ‘김정일 방중’의 징후를 찾으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드디어 뭔가를 찾았다고 판단한 것은 철교를 한참 쳐다보던 3월 31일 일이었다. 그날 단둥에는 하루 종일 옅은 비가 뿌리고 안개마저 짙었다. 철교 기둥 위로 군복 입은 남자 한 명이 올라가 오랫동안 기둥을 이리저리 살피는 게 보였다. 신의주 쪽에서도 남자 한 무리가 나와 철로 주변을 점검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현지 주민들은 비와 안개로 시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도 평일 오후에 이처럼 철교 곳곳을 점검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그 직전에는 중국에서 북한 쪽으로 남자 7명과 여자 1명이 무리를 지어 함께 들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무리 가운데 남자 1명은 고성능 카메라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이 움직이자 그와 동시에 북한에서 중국 쪽으로 중국 군인 1명과 여자 2명이 나오기도 했다. 압록강 철교 위에 이처럼 많은 사람이 교차해 지나가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는 게 현지 대북 소식통의 말이었다. 이를 리포트로 만들어 방송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김 위원장의 전용열차는 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날의 다리 점검은 일상적인 일이었고, 군복을 입은 이들도 군인이 아니라 일반 노동자였다. 중국에서는 노동자들이 군복 차림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헛다리를 짚어도 한참 짚은 셈. ‘김정일 방중 임박’을 기정사실로 단정하고 그 징후를 찾으려다 보니 주변 상황이 모두 그렇게만 보인 것이다.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천안함 폭침, 중국의 北 감싸기

    “겨우 2500만 명도 굶기나”…후진타오 訪中 김정일에 돌직구

    2010년 3월 31일 중조우의교를 점검하던 사람의 모습.

    결국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전용열차 취재를 접고 베이징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뒤인 2010년 5월 3일 새벽, 김 위원장의 전용열차는 한국 기자들이 없는 시간대에 단둥 철교를 유유히 통과해 중국으로 진입했다. 그의 다섯 번째 방중이자 필자가 겪은 첫 번째 방중은 그렇게 다가왔다. 김 위원장의 3박 4일 방중 기간 필자는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야 했다. 2명 이상씩 주재하는 다른 방송사 특파원과 달리 YTN은 1명뿐이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수시로 생방송에 참여하려니 출퇴근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때도 필자는 오보를 했다. 방중 당일인 5월 3일 김 위원장 일행은 첫 번째 행선지로 다롄을 택해 하루를 묵었다. 필자는 김 위원장 일행이 5월 3일 다롄을 출발해 당일 베이징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여러 가지 상황이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다. 소스는 중국통으로 알려진 한 한국인. 베이징 남(南)역에 1급 경계령이 내려졌는데, 김 위원장 방중 때문인 것 같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현장 확인 결과 실제로 남역 일대에 통제선을 두르고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기차역 안 매장도 모두 영업이 정지됐고 직원들의 출입도 전면 통제되고 있었다. 통제는 오후 시간대 1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더욱이 같은 시간 자칭린(賈慶林) 당시 중국 정치협상회의 주석이 남역 안으로 들어간 사실도 확인했다. 정치협상회의 주석은 중국 내 권력서열 4번째에 해당한다. 중요한 손님 영접 목적이 아니라면 움직이기 힘든 인물이다. 믿을 만한 취재원의 제보와 실제 현장 취재 결과를 바탕으로 김 위원장의 베이징 도착 가능성을 보도한 것이다.

    하지만 전용열차는 5월 3일 오후가 아니라 이틀 뒤인 5일 오후에야 베이징 남역에 도착했다. 자칭린 주석이 3일 오후 왜 베이징 남역에 갔는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다른 주요 인사를 맞으러 갔을 수도 있고, 혹은 김 위원장의 일정에 변화가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김 위원장은 5월 3일 다롄에서 숙박했으니 어느 경우에든 오보를 한 건 마찬가지였다.

    김 위원장의 5번째 방중이 특히 눈길을 끈 이유는 그 시점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천안함 폭침 사건과 관련해 민군 합동조사가 한창이었다. 이런 기간에 북·중 정상회담을 연다고 하니 다양한 추측이 불가피했다. 김 위원장의 방중이 마무리된 직후 중국 국영통신사인 신화통신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중국 외교부는 5월 7일 ‘중국이 천안함 폭침 사건 조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을 허락한 것은 북한에 대한 편파적인 지지가 아닌가’라는 취재진의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김 위원장의 방중은 오래전부터 준비된 비공식 방문으로 천안함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중략) 완전히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이 발견되기 전까지 남북 양측은 차분히 자제하면서 말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중국이 사실상 북한을 감싸고 나선 셈이다.

    김 위원장은 후 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양국의 이전 지도자들이 마음을 다해 쌓아온 전통적 우의는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교체돼도 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세대교체라는 표현이 들어갔다는 점에 주목해 양측 간 김정은 후계구도와 관련해 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겨우 2500만 명도 굶기나”…후진타오 訪中 김정일에 돌직구

    2010년 5월 중국 베이징 중심도로 창안가를 질주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차량 행렬(위). 2010년 5월 중국중앙(CC)TV를 통해 공개된 북·중 정상회담 장면.

    특파원 부임 석 달여 만에 처음 접한 대형 이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김 위원장 일행이 베이징 심장부로 진입할 무렵의 일이다. 톈진직할시 빈하이신구에서 산업시설을 둘러본 뒤 김 위원장은 베이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행이 탄 차량 30여 대가 베이징 시내 중심도로인 창안가를 지나갔다.

    당시 창안가 편도 4차선 도로는 전면 통제됐다. 필자는 창안가에 자리한 사무실에서 텅 빈 도로를 쌩쌩 달리는 김 위원장의 차량 행렬을 지켜봤다. 거의 언제나 차량이 정체되던 바로 그 도로가 이날만큼은 뻥 뚫린 것이다. 북·중 관계의 특수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길가에는 일정 간격으로 무장 경찰과 교통경찰이 배치됐다. 미국 대통령이 왔을 때도 전면 통제하지 않던 창안가를 김 위원장을 맞으면서는 폐쇄하는 특급 경호로 대접한 것이다.

    김 위원장의 다섯 번째 방중 기간 중엔 두 가지 특이한 점이 나타났다. 하나는 당초 김 위원장과 후 주석이 함께 하기로 했던 공연 관람이 성사되지 않은 것이다. 공연은 북한의 가무극 ‘홍루몽’. 이 가무극은 중국 고전소설을 개작한 것으로 북·중 우호의 상징으로 여겨지곤 했다. 특히 바로 그 전해인 2009년 ‘북·중 친선의 해’를 맞아 ‘홍루몽’은 김 위원장의 지도 아래 현대판 가극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처럼 각별한 의미 때문에 정상회담 후 마지막 하이라이트 행사로 예정됐던 건데, 돌연 취소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정상회담 다음 날 조기 귀환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북한 매체의 보도 내용이었다. 김 위원장 귀환 이후 북한 매체는 그의 방중 사실을 전하면서도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베이징 방문 일정 자체를 아예 빼버린 채 다롄과 톈진 방문 결과만 자세히 보도하며 당시 방중 성격을 ‘중국 동북 지역 방문’으로 규정했다. 과거 네 차례의 김 위원장 방중 보도에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정상회담 소식과 더불어 김 위원장이 중국 최고지도부로부터 얼마나 열렬히 환영받았는지가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중국 내 한 취재원이 그 이유를 들려줬다. 정상회담장에서 후 주석은 김 위원장에게 다음과 같은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당신과 나는 동갑이지만 지도자 위치에 오른 것은 당신이 나보다 훨씬 먼저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은 어떤가. 나는 13억 인구를 굶기지 않지만 당신은 2500만 명도 제대로 먹여살리지 못한다. 그래 놓고 우리에게 찾아와 식량을 달라고 한다. 북한과 중국은 사회주의 사업을 같은 시기 시작했는데 왜 현실은 이렇게 다른가. 북한도 이제는 변해야 한다. 당신도 덩샤오핑(鄧小平)처럼 개혁개방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부하들을 주렁주렁 이끌고 온 자리에서 후 주석이 이처럼 질타하자 김 위원장은 크게 격분했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조기 귀환했다. 불과 석 달 뒤 다시 중국을 찾게 되리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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