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2

2013.06.17

환등기로 종이에 투사 어긋난 간격 딱 걸렸어!

박정희 전 대통령 휘호 ‘독서신문…’ 공간 배치와 창작 습관 위조

  • 이동천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 특빙연구원

    입력2013-06-17 1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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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등기로 종이에 투사 어긋난 간격 딱 걸렸어!

    1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인본 ‘휘호’. 2 5500만 원에 낙찰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짜 ‘휘호’.

    “방금 전시장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예작품을 봤는데, 한 작품이 2007년 7월 서울옥션에서 고가에 팔린 박 전 대통령 글씨와 똑같다. 글씨에 먹이 묻지 않은 부분까지 똑같아서 당황스럽다. 차이가 있다면, 전시 중인 작품에만 ‘독서신문 창간에 즈음하여’라고 쓰여 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전시하는 측과 서울옥션에 문의했더니 하나같이 자기 작품이 진짜라고 주장한다.”

    필자가 며칠 전 전화로 들은 이야기다. 누구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가짜고, 어쩌면 둘 다 가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문제가 되는 두 작품을 보니 모두 가짜였다. 하나는 영인본(그림1)이고, 하나는 중국의 위조 기술로 만든 가짜(그림2)였다.

    화선지에 먹으로 붓글씨를 쓰면, 글씨 쓰는 속도와 필획의 겹침에 따라 먹의 번짐과 농담이 다르게 나타난다. ‘그림1’엔 이러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그림1’을 국회 의원회관 3층 로비에서 열린 ‘정전 60주년 기념 땡큐 유엔’ 행사 전시장에서 직접 봤는데, 역시 영인본이었다. 그 크기는 A4 용지보다 조금 커서, 실측해보니 세로 18.4cm에 가로 39.7cm였다. 크기만 봐도 진짜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림2’는 2007년 제107회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예상가 3500만~4500만 원에 출품돼 5500만 원에 낙찰된 박 전 대통령의 ‘휘호’다. 작품 크기는 세로 38cm에 가로 80cm로 ‘그림1’보다 2배 가까이 컸다. 필자는 ‘그림2’를 2007년 7월 서울옥션 프리뷰에서 봤다. 당시 ‘우리나라 사기꾼과 중국 위조 기술의 합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많이 당황스러웠다.

    환등기로 종이에 투사 어긋난 간격 딱 걸렸어!

    3 영인본 ‘휘호’와 가짜 ‘휘호’를 글자 크기를 같게 해서 맞춰본 결과.

    환등기로 종이에 투사 어긋난 간격 딱 걸렸어!

    4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2년 쓴 ‘휘호’.

    사기꾼 주문에 따라 제작



    원작의 존재를 모른 채 어떻게 ‘그림2’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그림2’는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가짜다. 사기꾼의 주문에 따라 위조자가 원작에서 ‘독서신문 창간에 즈음하여’라는 글자를 없애고, 30여 년 세월을 겪은 것처럼 꾸몄다. 사실 글씨와 인장만으로는 진위를 분명히 가리기가 쉽지 않은 상태였다.

    언제나 그렇지만, 위조자나 사기꾼도 가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림2’의 경우 원작에서 ‘독서신문 창간에 즈음하여’라는 글자를 생략하면서 정작 위조할 때는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공간 배치가 박 전 대통령의 창작 습관과 다르게 위조된 것이다. ‘그림1’과 ‘그림2’의 글자 크기를 같게 해서 겹쳐보면 바로 알 수 있다(그림3).

    위조자는 ‘독서하는 국민’과 ‘1970년 11월 3일’ 사이 공간을 지금의 반 정도로 하고, ‘1970년 11월 3일’을 뒤로 갈수록 올라가게 써야 했다. 박 전 대통령이 1972년 3월 쓴 ‘책은 만인의 것’(그림4)을 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위조자는 이러한 생각 없이 박 전 대통령의 서예작품을 기계적으로 베끼기만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세로보다 ‘가로로 쓴 서예작품’이 더 좋다. 먼저 글씨의 공간 배치가 눈에 띈다. 매우 특색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던 전통 서예작품과 달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썼다. 이는 시대 변화를 서예작품에 새롭게 반영한 것으로, 기존에 없던 새로운 스타일이다.

    특히 창작 연월일과 서명의 공간 배치에 주의했던 것 같다. 박 전 대통령 이전엔 붓글씨를 오른쪽으로 썼든 왼쪽으로 썼든, 작품의 마지막 글자 옆에 창작 연월일과 이름을 쓰고 인장을 찍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창작 연월일과 서명을 작품 아래에 써서 웅장함과 긴장감을 줬다. 또한 긴 한글 문장을 세로로 길게 쓰지 않고 가로로 나눠 두세 줄로 써서 한글 서예의 색다른 아름다움을 찾았다. 서예사적 가치가 있다.

    위조 작품 만드는 두 가지 방법

    환등기로 종이에 투사 어긋난 간격 딱 걸렸어!

    5 2550만 원에 낙찰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짜 ‘휘호’. 6 ‘주간동아’ 868호에서 ‘그림5’를 가짜로 감정했던 도판.

    그렇다면 ‘그림2’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가능한 위조 방법 중 두 가지를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첫째, 원작 크기에 맞춰 인쇄한 복제품을 확대하거나 축소 복사한다. 조명이 들어오는 ‘라이트 박스’ 위에 복사한 종이를 올려놓고 그 위에 화선지를 겹쳐놓는다. 보이는 대로 윤곽선을 따라 그린다. 복제품을 보면서 먹으로 윤곽선 안을 글씨 쓰듯 채운다.

    둘째, 원작이나 복제품을 찍은 사진을 환등기(프로젝터)를 이용해 벽에 붙인 종이에 투사한다. 투사된 글씨의 윤곽선을 종이에 그린다. 사진이나 복제품을 보면서 윤곽선 안을 자연스럽게 메운다.

    두 번째 방법은 1990년대 중국 미술시장에서 처음 선보였다. 매우 정교한 수법으로 제작돼 처음엔 전문 감정가조차 그 진위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결국 단점이 발견됐다. 투사하는 과정에서 각도를 정확히 맞추기가 쉽지 않아 공간 배치가 원작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림2’는 바로 환등기를 이용한 가짜다. 필자가 ‘주간동아’ 868호에서 밝혔듯 2009년 제114회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2550만 원에 낙찰된 박 전 대통령의 가짜 ‘휘호’(그림5)와 똑같은 방법으로 위조됐다. ‘그림5’를 원작 도판과 맞춰보면, ‘그림3’처럼 글자 사이의 상하좌우 간격이 맞지 않는 문제점이 잡힌다(그림6).

    미술시장에서 진짜를 사는 것은 ‘보물찾기’에 비유된다. 그만큼 진짜가 드물다는 뜻이다. 수요는 많은데 작품이 없다면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한다. 미술시장에서 박 전 대통령의 진짜 서예작품을 보호하고 싶다면, 먼저 박 전 대통령의 모든 서예작품 도판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수록한 카탈로그 레조네(raisonne)를 출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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