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2

2013.06.17

“쉬쉬하는 가정폭력 여성들 소리 없이 죽어간다”

정춘숙 한국여성의전화 공동 상임대표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13-06-17 09: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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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쉬하는 가정폭력 여성들 소리 없이 죽어간다”

    정춘숙<br>● 1964년 서울생<br>● 1986년 단국대 국문학과 졸업<br>● 1998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br>● 2011년 강남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 박사과정 수료<br>● 現 (사)한국여성의전화 공동 상임대표



    “여성의전화가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을 분석해 남편이나 애인 등에게 살해된 사람 수를 헤아렸다. 지난해만 해도 121명이었다. 실제로는 더 많은 여성이 가정폭력 탓에 사망했을 것이다. 수많은 자살자 가운데 가정폭력 때문에 죽음을 택한 경우도 많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폭력으로 죽은 여성에 대한 실태조차 파악하지 않는다.”

    ㈔한국여성의전화(여성의전화)는 6월 11일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여성의전화는 여성이 겪는 가정폭력 등을 사회문제로 부각시킨 여성단체로, 폭력 피해자 여성들을 법적, 정신적으로 지원하고 ‘성폭력’ ‘가정폭력’ ‘아내 강간’ 같은 용어를 만들어 이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주간동아’와 만난 정춘숙(49) 여성의전화 공동 상임대표는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1992년부터 여성의전화에 몸담은 그는 이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한 활동가. 그가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가정폭력은 집안일 아닌 ‘범죄’

    “요즘은 여성인권에 대한 인식이 확산된 편이다. 예전에는 가정폭력 사건을 경찰서에 신고하면 경찰이 출동조차 하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가정폭력 가해자 남편이 가정폭력 피해자 아내를 지원하는 활동가들을 인신매매단이라고 경찰에 신고해 활동가들이 잡혀가기도 했다. 그만큼 가정폭력을 범죄가 아닌 집안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상담전화는 끊이지 않았다. 창립 첫해 6개월 동안 상담전화 2000여 건이 걸려왔는데 요즘도 한 달 평균 3000여 건이 걸려온다.”



    하지만 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가 노력한 결과 1997년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가정폭력 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고, 사회적 인식은 조금씩 개선됐다. 당시 여성의전화는 언론에 단신으로 처리된 사건 등을 추적해 가정폭력과의 연결고리를 찾아 그 피해자를 구조했다. 그러다 보니 존속살해 사건 가해자들을 지원하는 일도 생겼다.

    “1995년 고등학생이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에서는 패륜범죄로 조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당사자를 만났고, 그 학생이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엄마가 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건이 발생한 이유도 엄마를 구출하려다 우발적으로 아버지를 찌른 것이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동아리 회장을 맡을 수 없던 정 대표는 점차 여성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면 여성이 겪는 가정폭력이 근절돼야 한다고 느꼈다. 가정폭력이란 1차 폭력을 경험한 아이들이 학교폭력의 가해자, 피해자가 되고, 또다시 이들이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양상을 목격한 탓이다. 그는 오늘날에도 남편에게 맞아 죽는 여성들 사례를 접하며 “가족 안에서 권력관계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한다.

    정 대표가 부부의 재산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그래서다. 사실상 여성이 권리 주체로 인정받으려면 여성의 재산권이 확보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다행히 여성의전화가 추진한 부부재산 공동명의운동은 빠른 시일 안에 효과를 거둬, 상당수 부부가 자발적으로 재산권을 공평하게 나누는 추세다.

    “1998년 당시 일흔이던 할머니가 남편을 상대로 재산분할 및 위자료 청구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남편이 함께 모은 재산을 대학에 일방적으로 기부했다는 이유에서다. 우리는 이 사건을 지원하면서 여성의 재산권문제를 제기했다. 우리나라는 부부가 함께 모은 재산이라도 명의에 따라 각자의 재산으로 보는 ‘부부별산제’를 따르기 때문에 여성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재산이 없으면 이혼 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부부가 결혼한 이후 모은 재산은 공동 재산으로 간주하고 이혼 시 반으로 나눈다’는 민법개정안을 추진했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가정폭력 처벌 여전히 솜방망이

    한편 여성의전화에서는 피해자 여성들을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1987년 만들어진 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쉼터는 65개로 늘었다. 또한 83년부터 여성 관점에서 여성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는 ‘여성주의상담’을 진행한 결과 상담소도 200여 개로 늘었다. 이는 여성의전화가 25개 지역에서 제 몫을 해낸 결과다. 또한 피해자를 법적으로 지원하는 데서 더 나아가 피해자의 역량을 강화하는 사업을 병행한다. 그럼에도 어려운 점은 많다.

    “특히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경미하다. 실제로 가정폭력 가해자가 구속되는 경우는 1%도 채 되지 않는다. 대부분 법원에서 상담명령, 보호처분을 받을 뿐 형사처벌은 면한다. 성폭력은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당하는 폭력이라는 이유로 가해자 처벌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이뤄지는 데 비해 가정폭력은 그렇지 않다.”

    정 대표는 앞으로도 여성 인권문제에 천착할 생각이다. 여성의 절반이 가정에서 언어적, 신체적, 성적 폭력을 당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난한 여성뿐 아니라 지위가 높은 여성도 가정폭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고등학생뿐 아니라 대학생들에게 데이트폭력 등 다양한 여성 폭력에 대한 내용을 전하려고 한다. 여성의전화가 모든 사람이 와서 힘을 얻고 가는 곳이 되길 바란다. 또한 사회경력이 단절된 여성에게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면 좋겠다.”

    최근 한국여성의전화가 지원하는 가정폭력 사례들

    “어떤 걸로 맞아 죽을래”… 집이 아니라 지옥


    # 여성이 죽거나

    다음 아고라 사건 2011년 한 여성이 오랫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피해자 여성의 어머니는 딸이 맞아 죽었다며 하소연했고, 한 청년이 이 내용을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에 올려 파장을 불러왔다. 시체 부검 결과 ‘외부 압력으로 죽었다’ ‘외부 압력으로 죽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결과가 분분해 2심에서 남편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게다가 피해자의 딸이자 가해자의 딸이 법정에서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지 않았다”고 증언한 상황. 현재 대법원 상고를 앞뒀다.

    부부상담 과정 중 살해된 사건 여성은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와 결혼했다. 남편은 10년 동안 칼 등 흉기를 나열해두고 “어떤 걸로 맞아 죽을래”라며 위협을 일삼았다. 여성은 이 일로 쉼터에 3번이나 입소했다. 결국 여성은 이혼소송을 제기했고, 가정법원에서는 판결에 앞서 이혼 대신 남편과 상담을 받으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남편은 올해 5월 상담을 진행하던 중 쉼터에 머물던 아내를 회유해 집으로 데리고 간 뒤 그다음 날 목 졸라 살해했다. 현재 재판을 앞뒀다.

    # 여성이 죽이거나

    정숙현(가명) 씨 사건 2012년 7월 정숙현 씨가 남편을 살해했다. 사건 발생 일주일 전 고3 아들이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아버지를 폭행했고, 이를 수사한 경찰은 아들이 존속살해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어머니는 자신이 이 일을 끝내지 않으면 아들까지 가정폭력 피해자가 되겠다고 판단해 남편을 살해했다. 정씨는 1심 재판 결과 5년, 2심에서 4년을 선고받았다. 여성의전화는 정당방위 사건으로 간주해 집행유예를 기대한다. 대법원에 상고할 예정이다.

    도움말 |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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