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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위기의 공공의료 03

믿고 치료해요, 의료생협

지역주민들 출자 ‘환자가 주인’… 과잉 진료나 투약 걱정에서 벗어나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믿고 치료해요, 의료생협

믿고 치료해요, 의료생협

지역주민이 조합원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안산의료생협 새안산의원 전경.

“어르신, 잠시만 기다리세요. 저 점심 좀 먹고 올게요.”

경기 안산시 우리생협치과 권영국(38) 원장은 오후 1시 병원을 나서다 막 병원에 들어오려는 환자와 마주치자 이렇게 말했다. 일반 병원 같으면 닫힌 현관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을 환자도 태연히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그래요. 점심시간인 거 알고 왔는데 뭐. 나 여기 있을 테니 천천히 갔다 와요.”

우리생협치과는 안산의료생활협동조합(안산의료생협)이 운영하는 병원. 지역주민들이 출자해 협동조합을 만들고 병원을 세운 뒤 권 원장을 채용해 진료를 맡긴 형태다. 환자가 ‘주인’이니 ‘고용인’ 의사가 그에게 병원을 맡기고 나서는 게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상운(44) 안산의료생협 경원지원실장은 “우리 병원에서는 ‘환자가 주인’이라는 말이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라 실질”이라며 “그 덕분에 환자들은 과잉 진료에 대한 불안 없이 치료를 받고, 의사는 병원 운영 고민 안 하고 진료에만 전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11년부터 우리생협치과에서 일해온 권 원장도 이 말에 동의한다. 그는 “일반 치과 재직 시절에는 환자에게 치료 내용을 설명하면 ‘돈을 또 얼마나 내라 하려고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는 무슨 말씀을 드려도 믿어주니 의사로서 더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최근 공공의료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이러한 의료생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의료생협이 1990년대 중반 공공의료의 공백을 메우면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지역사회 건강하게 만드는 구심점

믿고 치료해요, 의료생협

경창수 안산의료생협 이사장.

우리나라에서 의료소비자가 설립 및 경영에 참여하는 의료기관이 처음 문을 연 건 20년 전. 1994년 경기 안성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연세대 의대생들이 지역 청년회원들과 함께 ‘지역주민이 주인 되는 병원 설립’을 모색한 게 계기가 됐다. 당시 안성은 상대적으로 낙후한 농촌으로 변변한 병·의원이 없었다. 김보라 안성의료생협 전무는 “주민들은 의대생들과 대화를 통해 건강이 누군가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출자금을 모아 스스로 건강을 돌볼 수 있는 협동조합을 만들었다며 “이후 질병치료뿐 아니라 예방 및 건강증진 활동 등을 통해 지역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의료생협을 운영해왔다”고 밝혔다.

1996년 문을 연 인천평화의료생협도 인천 부평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산업재해와 직업병 상담 및 진료 등을 담당하던 민중의원이 지역주민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며 만든 것. 2000년 설립한 우리나라 3호 안산의료생협은 1990년대 중·후반 안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생활과 환경을 지키는 안산 시민의 모임’ 등 시민사회단체가 주도했다. 경창수 안산의료생협 이사장은 “당시 이 지역에 있던 반월공단 노동자 등 지역주민의 의료, 건강, 생활 관련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이 의료생협 설립 당시 중요 관심사였다”고 밝혔다.

이처럼 기존 의료체계에서 소외된 지역주민 복지와 의료 증진을 위해 설립한 병원인 만큼, 운영 방식이 일반 영리병원과 크게 다르다. ‘의료생협 환자권리장전’ 등을 통해 환자 보호에 최우선의 관심을 쏟는 것이 특징(상자 기사 참조). 질병 치료보다는 예방에 중점을 두고, 과잉진료 및 투약을 하지 않는 것도 의료생협의 공통점이다. 살림의료생협이 운영하는 서울 은평구 역촌동 살림의원의 추혜인 원장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10년 상반기 ‘급성 상기도 감염(감기의 일종)’에 대한 항생제 처방률은 전국 의원급 평균이 53.2%. 반면 의료생협은 5.9~20.5%에 그쳤다.

찾아가는 진료 서비스 제공

믿고 치료해요, 의료생협
의료생협은 여전히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하는 데도 앞장선다. 안산의료생협 고용의사의 근로규정에는 ‘일주일에 4시간 이상 방문진료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장애인, 노인 등 의료취약계층에게 ‘찾아가는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경창수 안산의료생협 이사장은 “집 안에 사실상 방치돼 있다시피 한 독거노인들은 일반 의료기관이나 지자체 복지담당 공무원이 돌보기 어렵다. 우리는 이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하면서 말동무를 해드리고, 반찬 등 먹을거리도 전달한다. 공공의료와 복지가 미처 닿지 못하는 영역에서 의료생협이 보완재 구실을 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안산의료생협은 갑작스런 경제상황 악화로 위기상황에 놓였으나 정부의 지원기준에 해당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경기도의 ‘무한돌봄사업’에도 참여해 무상진료를 제공하고 있다.

‘환자 우선’ 의료 서비스와 공공 활동을 바탕으로 신뢰를 쌓은 의료생협은 최근 크게 성장하고 있다. 안성의료생협이 운영하는 병원은 안성농민의원, 우리생협의원, 서안성의원 등 가정의학과 의원 3개와 한의원 2개, 치과 등 6개에 달한다. 지난해 말 현재 4800여 가구가 조합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안성시민 10명 중 1명이 의료생협의 ‘공동 소유자’인 셈이다. 1999년 44명의 발기인이 모여 시작한 안산의료생협도 2003년 가입 조합원 1000세대를 넘어선 뒤 2009년 2000세대, 2011년 5000세대로 규모가 급성장했다. 현재 치과 외에도 가정의학전문의 2명이 있는 일반 병원과 한의원, 건강검진센터, 요양원 등을 운영중이다.

믿고 치료해요, 의료생협

경기 안산시 우리생협치과에서 권영국 원장이 환자를 치료 하는 모습(위)과 새안산의원의 진료과목.

주의할 것은 의료생협 외관을 한 채 영리를 추구하는 ‘가짜 의료생협’도 적지 않다는 점.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료생협은 300곳이 넘는다. 전문가들은 이 중 상당수가 사무장이 의사를 고용해 운영하는 이른바 ‘사무장 병원’일 것으로 추정한다. 현행 의료법에 따르면 의사 면허가 없는 개인은 병원을 설립할 수 없다. 하지만 협동조합을 만들면 일반인도 병원을 세울 수 있다. 이 틈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협동조합을 구성한 뒤 ‘의료생협’ 이름을 붙이고 사실상 영리 목적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사무장 병원’은 개설 목적 자체가 돈을 벌려는 것이기 때문에 과잉 진료, 편법 진료 등을 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금융감독원에서 보험사기를 적발한 결과 1/4이 ‘사무장 병원’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共益과 公益 더불어 추구

현재로서는 이들과 주민 참여를 기반으로 설립한 정통 의료생협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기준은 한국의료생협연합회(연합회) 가입 여부다(표 참조). 의료생협 활동가 등이 모여 설립한 이 단체는 의료생협 연혁과 창립총회의사록, 정관사본 등을 검토해 조합원이 실질적으로 운영에 참여하는 것이 확인된 의료생협만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앞으로는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도 주민참여형 의료생협과 ‘가짜’를 구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12년 12월 개정된 협동조합기본법은 일반협동조합과 사회적협동조합을 구분한다. 양자를 구별하는 기준은 ‘공공성’. 지역사회 의료 및 돌봄서비스 제공 등 공공적인 구실을 하는 협동조합이 ‘사회적협동조합’으로 등록하면 법인세 50% 면제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경창수 안산의료생협 이사장은 “연합회 회원 의료생협들은 다양한 공익의료활동을 하는 만큼 조합원 동의 절차 등만 거치면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할 수 있다. 안산의료생협도 5월이면 안산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으로 거듭난다. 앞으로도 공공의료의 빈틈을 메우고 의료생협 구성원의 공익(共益)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인 공익(公益)까지 함께 추구하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의료생협 환자권리장전

“존엄한 인간으로 치료받을 권리 존중”


환자는 투병의 주체자이며 의료인은 환자를 치유의 길로 이끄는 안내자이다. 환자는 이윤 추구나 지도의 대상이 아니라 존엄한 인간으로 존중받는 가운데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 이에 우리는 모든 환자의 다음과 같은 권리를 존중한다.

1. 알 권리

모든 환자는 담당 의료진으로부터 자신의 질병에 관한 현재의 상태, 치료계획 및 예후에 관한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으며 검사 자료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2. 자기결정권

모든 환자는 치료, 검사, 수술, 입원 등의 치료행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시행 여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3. 개인 신상 비밀을 보호받을 권리

모든 환자는 진료과정에서 알려진 사생활 및 신체의 비밀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담당 의료진이나 그 외 법적으로 허용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개인의 의무기록 열람을 금함으로써 진료상의 비밀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4. 배울 권리

모든 환자는 질병의 예방, 요양 및 보건, 예방 등에 대해 학습할 권리가 있다.

5. 진료받을 권리

모든 환자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최선의 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비합리적 의료보장제도의 개선과 자신에게 유해한 생활환경, 작업환경을 개선토록 국가 및 단체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

6. 참가와 협동

모든 환자는 의료종사자와 함께 힘을 합쳐 이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갈 권리가 있다.





주간동아 2013.04.08 882호 (p28~30)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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