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8

2013.03.11

콘텐츠 바꿨다면 심의 절차 밟아야

교과서 내용 수정

  • 최강욱 법무법인 청맥 변호사

    입력2013-03-08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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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텐츠 바꿨다면 심의 절차 밟아야
    적법한 심의절차를 거치지 않고 검정교과서의 실질적인 내용을 바꾸게 한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의 수정명령은 위법하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2월 15일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 등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공동저자 3명이 교과부 장관을 상대로 낸 수정명령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교과서 공동저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대법원은 “교과서 검정제도는 헌법상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구현하려는 것으로, 교과부 장관의 수정명령이 교과서의 기술적 사항이나 객관적 오류를 바로잡는 정도를 넘어 실질적으로 내용을 바꾸는 정도라면 새로운 검정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밝힌 뒤 “원심은 수정명령 대상이나 범위가 검정을 거친 내용을 실질적으로 변경하는 결과를 가져오는지 따져보고 피고가 교과용도서심의회 심의에 준하는 절차를 거쳤는지 여부를 심리했어야 한다”며 절차상 하자가 없다고 판단한 고등법원 판결을 질책했다.

    금성출판사가 발행한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는 2002년 7월 교과부 검정 합격을 받고 이듬해 초판을 발행했다. 2004년 10월 국정감사에서 당시 권철현 한나라당 의원이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친북, 반미, 반재벌 관점에서 서술됐다”는 취지로 비판해 ‘좌편향 교과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어 뉴라이트 성향 단체 ‘교과서포럼’의 논리를 이어받은 대한상공회의소가 정부에 교과서 수정을 압박했고, 이는 결국 ‘금성교과서 파동’을 촉발해 교과서를 불태우는 시위로까지 이어졌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금성출판사는 전교조만 두렵고 정부가 무섭지 않느냐”는 발언까지 했다. 이에 교과부가 2008년 11월 총 29개 항목에 대한 수정 지시를 내리자 공동저자가 이에 반발해 소송을 낸 것이다.

    1심은 “수정은 실질적으로 검정과 같으므로 교과용도서심의회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위법하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그러나 2심은 “수정은 검정이나 개편과는 개념적으로 구분되고, 관계 규정상 수정명령은 검정 절차와 달리 교과용도서심의회 심의를 거치도록 하지 않고 있다”며 절차상 하자를 인정하지 않아 원고 패소 판결했다.

    권력은 교육을 통해 자기 의지를 관철하고 지배논리를 주입하려는 유혹을 느낀다. 대법원은 단순한 수정이 아니라 전체 교과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이라면 교과부 장관 재량권을 넘어선 행위라고 판단했다. 이런데도 교과부는 장관의 교과서 수정 권한의 근거 법령을 대통령령에서 법률로 격상하고, 장관이 ‘감수’를 이유로 교과서 검인정 단계에서부터 개입할 수 있도록 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대법원 판결과는 거꾸로, 오히려 장관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입법화하려는 것이다. 이는 헌법 취지를 정면으로 훼손하는 행정력 남용이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교과서는 자라나는 세대의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발전은 건전한 역사관에 기반을 둘 때만 가능하다. 그런 만큼 헌법이 선언한 교육 가치와 사명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헌법적 가치인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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