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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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십니까 식물에도 체질이 있습니다”

‘철학하는 농부’ 이훈규의 30년 농사 인생

  •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입력2012-11-05 10: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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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기십니까 식물에도 체질이 있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육묘 중인 채소류.

    “음과 양이 서로 도와 사계절을 이루고, 춘하추동 사계절이 다시 서로 도와 춥고() 따뜻한(熱) 것을 이루고, 춥고 따뜻한 것이 다시 서로 도와 습함()과 건조함(燥)을 이루니, 이 둘이 서로 도와 마침내 한 해를 이룬다는 게 노자 ‘도덕경’의 얘기입니다.”

    독특한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농부 이훈규(55) 이온종묘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어떤 원리로 농사를 짓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동문서답 혹은 고아한 선문답일까. 자연은 오로지 사계절의 한란조습(寒暖燥濕)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봄여름에는 만물을 키우고 성장시키며 가을겨울에는 거두고 죽이는 작용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뿐이니, 온도와 습도의 변화에 따라 농사를 지으면 된다는 게 이 대표의 간단명료한 농법이다.

    이 대표 명함에는 경기 고양시에 자리한 이온종묘 대표라는 타이틀 외에도 ‘오행농학연구소(五行農學硏究所)’라는 연구기관 대표 이름도 있다. 그가 ‘도덕경’의 표현을 빌려 언급한 천지음양, 한란조습이 사실상 동양 고유의 자연관인 음양오행 이론에 바탕함을 보여준다. 이 음양오행 이론을 사람에게 적용한 학문이 바로 사주팔자를 풀이하는‘명리학(命理學)’과 체질 건강을 주창한 조선 말기 의학자 이제마의 ‘체질의학’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대표는 명리학 고수를 찾아 오랫동안 명리 공부를 한 전력에 체질의학 이론을 적용해 오행농법을 실천하고 있었다.

    “동무 이제마는 1년에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사람 체질도 네 가지가 있다면서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이라는 사상의학을 주창했습니다. 그런데 동무 선생은 체질을 분류하는 원칙은 설명했으나 체질별로 처방하는 약제를 분류하는 원칙은 설명하지 않았고, 후대 사상체질의학자들도 체질 음식을 분류할 때 그 이유를 정확하게 제시하지 못했죠. 그래서 제가 음양오행론자로서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식물을 분류하는 기준을 제시한 겁니다.”

    명리학 공부 바탕 오행농법 실천



    그가 무척 잔잔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바람에 기자는 이 말이 가진 큰 의미를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한의학계에서 체질의학자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체질별 약제 처방이 너무 소략하다는 점. 게다가 약제를 체질별로 제대로 분류하기도 버거운 상태라는 게 많은 사상체질의학자들의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대표가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체질별 식물분류를 해낼 수 있는 툴(도구)을 개발해낸 것이다.

    “천지의 변화는 ‘온도’와 ‘습도’에 따라 일어나고 이는 사람, 식물 할 것 없이 똑같이 영향을 받습니다. 저는 식물에 대해 수많은 실험을 한 결과 ‘온도 20℃(기준)에서 잘 자라는 여름기질 식물’과‘온도 30℃(기준)에서 잘 자라는 겨울기질 식물’이 있다는 걸 찾아냈습니다. 마찬가지로 ‘온도 25℃(기준)에 습도가 낮은 환경에서 잘 자라는 가을기질 식물, ‘온도 25℃(기준)에 다습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봄기질 식물’도 밝혀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른다면 쑥갓 같은 열성(熱性)기질(여름기질) 식물은 20℃의 비교적 차가운 환경에서 잘 자라 몸이 찬 소음인과 궁합이 맞고, 상추와 오이 같은 냉성(冷性)기질(겨울기질) 식물은 30℃의 비교적 더운 환경에서 잘 자라 몸이 뜨거운 소양인과 궁합이 잘 맞는다. 마찬가지로 체질이 건조한 태양인의 경우 건조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메밀과 궁합이 맞으며, 체질이 습한 태음인의 경우 습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무와 찰떡 궁합이다.

    그의 ‘도사’ 같은 얘기에 푹 빠져들었다가 잠시 차 한잔 마시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집무실이자 농사를 짓는 터는 경기 일산의 북쪽 끝자락에 있는 농지로, 4958.68㎡(1500평) 땅 전체를 비닐하우스로 꾸몄다. 그는 이곳 온실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한편 상추, 전대, 배추, 고추, 토마토 같은 채소를 육종해 농가에 보급하는 일을 한다.

    비닐하우스 곳곳엔 육종 중인 채소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런데 비닐하우스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빨간색 꽃이 눈에 띈다. 자세히 보니 카네이션이다. 기자는 연분홍이나 진분홍 카네이션은 많이 봤어도 장미꽃처럼 빨간색 카네이션은 거의 보지 못했다.

    토종 카네이션 개발도

    “믿기십니까 식물에도 체질이 있습니다”

    이훈규 대표가 개발해 특허 낸 빨간색 카네이션.

    “아, 그거요? 제가 개발해 특허 낸 카네이션인데 이름을 ‘만수무강’이라고 지었습니다. 현재 카네이션 시장의 10% 정도는 우리 카네이션이 차지하는데, 점차 시장점유율이 늘어날 걸로 예상합니다. 다른 품종보다 낮은 온도에서 재배할 수 있고 생육기간도 짧아 온실재배 비용을 대폭 낮출 수 있어 그만큼 가격 경쟁력이 있죠. 그리고 이 카네이션만큼은 외국에 로열티를 물지 않는 토종 개발품입니다. 앞으로 다른 색깔도 개발해 해외에 수출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얼마 전엔 ‘화분용 카네이션’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는데 반응이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이 대표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가득 묻어 났다. 사실 이 대표가 국산 카네이션을 개발한 것은 그의 30년 농업 인생에서 자그마한 성과물에 불과하다. 이 대표는 농부로서는 상당히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다. 1982년 서울대 농대 원예학과를 졸업한 그는 5년간 국내 굴지의 종묘회사에서 일한 뒤 87년 독립해 육묘 및 육종 사업에 진출했던 것.

    식물과 ‘연애’에 빠져 아직도 미혼인 그는 현재도 연구를 진행 중이다. 2005년 서울대 대학원에서 ‘채소작물의 음양오행학적 고찰’이란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현재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모교인 서울대에 식물에도 체질이 있고 식물분류학에서 획기적 성과를 거둘 수 있으니 연구해보라고 권유했는데, 아무도 달려들지 않더군요. 그래서 농사지으면서, 꽃도 팔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연구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의 박사논문 주제는 한방서적인 ‘동의수세보원’의 약방 조제원리와 그것의 농학적 이용에 관한 것이다. 보충 설명하자면, 한약 재료를 사상 체질별로 일일이 분류해 처방약을 더욱 광범위하게 또 효율적으로 사용케 함으로써 환자의 체질별 치료율을 현격히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체질별 식물분류는 곧장 한의학의 국제 경쟁력 제고는 물론, 천연식물을 주재료로 삼는 약학계에서도 큰 구실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덧붙인다.

    그와의 온실 방담을 마치고 나오는 길. 기자를 보고 그가 “태음인은 습한 곳에서 병에 잘 걸리니 습한 환경을 주의하세요”라는 말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사상체질로 식물을 관찰하는 동안 사람체질에도 정통했나 보다. 그런 기자 생각을 읽었을까.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연을 보면 사람도 보이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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