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7

2012.07.23

우리는 다채롭다

  • 입력2012-07-23 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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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다채롭다
    사람들

    나는 나에게서 나왔다 예전에 나는 나로 가득 차 있었다

    입안에서 우성이를 몇 개 꺼내 흔든다

    사람들은 어떤 우성이를 좋아하지

    우성이는 어둠이라고 부르는 곳에 살았다



    그때는 우성이가 다를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미남일 필요조차

    그러나 가장 다양한 우성이는 우성이었다

    공기의 모양을 추측하는 표정으로 사람들이 서 있다

    우성이가 사실인지 어리둥절하다

    우성이를 만진다

    우성이가 자신과 똑같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나 우성이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나는 내가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수십 수백만 개의 우성이가 떠오를 거라고 말했다

    ―이우성 ‘사람들’(‘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 문학과지성사, 2012 중에서)

    우리는 다채롭다

    성함이 어떻게…? 낯선 자리에 가면 낯선 이가 으레 이런 질문을 하게 마련이다. 내가 내 입으로 내 이름을 말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게다가 나는 명함도 없으니 더욱더 내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한다. 입을 한데 오므렸다가 이내 양옆으로 벌려 발음해야 하는 내 이름. “공기의 모양”을 변화시키는 내 이름, 오은.

    또래끼리 어울리는 자리가 있었다. 여느 서먹서먹한 자리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동안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쭈뼛댔다. 공간은 우리밖에 모르는 우리로 “가득 차 있었다”. 침묵은 불편했지만, 섣불리 깨뜨리기엔 너무 단단했다. 그러다 누군가의 주도로 통성명을 시작했다. 우리 거의 다 동갑이니까, 그냥 말 편히 하자. 괜찮지? 불편한 제의였지만 반발할 만한 용기도 없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야 했다.

    구석에 서서 사람들의 동선을 유심히 살피던 중이었다. 어색한 웃음소리가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때 옆에 있던 한 여자애가 말을 걸어왔다. 넌 이름이 뭐니? 나, 오은. 장전된 총알이 발사되는 것처럼, “입안에서” 내 이름을 휙 끄집어냈다. 나는 분명 쉼표를 찍으며 발음했다고 생각했지만, 말하는 속도가 빨라 상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까 시 쓴다고 했던가? 응. 아, 그럼 나오은 작가라고 불러야겠네. 그녀가 혼잣말로 내 이름을 되뇌다 수첩을 꺼내 그것을 옮겨 적는 모습을 보고 나오은은, 아니 오은은 그야말로 자지러지고 말았다.

    얼마 뒤 그녀를 다시 만났다. 한참 얘기를 나누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너 그때랑 사뭇 다르다? 그때는 수줍고 제법 진중한 아이였는데. 그 말에는 다소간의 실망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늘 “사람들은 어떤” 오은을 더 좋아한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내가 그때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그건 아니야. 그때는 그때의 오은이었지. 오은이 그때의 오은에 충실했던 거지.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거든. 사람이 어떻게 한 가지 모습만 보여줄 수 있겠니. 재미없게 말이야. 나는 “다양”해. 내 모습은 아주 많아. “수십 수백만 개의” 오은이 있다는 말이야. 그녀는 지난번의 나와 이번의 나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자리를 떴다. 쌩하고 찬바람이 일었다.

    “우성이”는 여전히 우성이지만, 우성(優性)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성이는 나타난다. 어떻게든 세상에 고개를 내민다. 지금도 하나의 우성이는 두 개의 우성이, 세 개의 우성이, 더 많은 우성이로 분화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나는 많고 너는 많다. 우성이는 많다. 우리는 여럿이다. 우리는 다채롭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자꾸 나온다. 삶이 생동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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