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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은의 vitamin 詩

꼭 쥔 손은 서로를 알아본다

꼭 쥔 손은 서로를 알아본다

꼭 쥔 손은 서로를 알아본다
커플 벙어리장갑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더니 커플 장갑을 줬다

크리스마스 이벤트로

혼자 커플 손이 되어보려는 나의 두 손

얼마나 멀리 있었는가 나의 손과 손은



나의 손과 손 사이로 지나간 것은

절벽의 침묵

침묵에 이어진 길고 긴 어둠

벙어리장갑 속 손들은 서로를 꼭 쥔다

서로 쥐고 서로 지운다

커플 벙어리장갑

방구석에 툭 떨어지는 벙어리 손들

― 김경후 ‘커플 벙어리장갑’

(‘열두 겹의 자정’ 문학동네, 2012 중에서)


꼭 쥔 손은 서로를 알아본다

나는 재수를 했다. 재수가 없는 아이들은 재수를 하게 마련이지. 스스로를 비웃다가 문득 쓸쓸해지는 일이 잦았다. 재수하는 친구들끼리 모일 때면 사이좋게 울상을 지었다. 대학에 들어간 친구들의 근황, 고등학교 선생님과 얽힌 갖가지 추억이 우리의 주된 얘깃거리였다. 신선한 소재는 등장하지 않았고, 우리는 과거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다. 앞날이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얘기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툭 끊겼다. 신세타령으로 넘어가면 우울해질 게 빤하니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절벽의 침묵”을 반찬 삼아 꾸역꾸역 쌀밥을 씹어 넘겼다.

재수생은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닌 이상한 신분이었다. 고등학생 할인도 받을 수 없었고, 대학생 특혜도 누릴 수 없었다. 그 어디에서도 떳떳하지 못했다. 친구를 만나는 일도 예전처럼 쉽지 않았다. 걔들은 바빴다. 늘 어떤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닌 대학생의 일이. 재수생들은 “침묵에 이어진 길고 긴 어둠”에 자발적으로 기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학원으로 독서실로, 뿔뿔이 옹기종기.

수능을 석 달쯤 앞두고 나 또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날이었다. 늦게까지 남아 자율학습을 하다 어떤 여자애를 보았다. 정말이지 열심이었다. 자정이 다 될 때까지 우리는 서로 경쟁하듯 공부했다. 한동안 연필이 노트 위를 사락사락 미끄러지는 소리만 들렸다. 밖으로 나오자 원내의 모든 불이 일제히 꺼졌다. 후덥지근한 여름밤이었다. 몹시 갈증이 났다. 학원 옆에 새로 생긴 카페가 보였다. “커피 한잔할래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말을 해버렸고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더니 커플” 모자를 줬다. 우리는 학원에서 공부를 했더니 커플이 되었다. 자정의 커피 한 잔이 가져다준 행운이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커플 손이 되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마침내 11월이 됐다. 우리는 두 번째 수능을 쳤다. “나의 손과 손”은 셈하고 밑줄 긋느라 정신없었다. 한나절이 빽빽하고 빡빡하게 지나갔다. 마지막 종이 울리자 거짓말처럼 목이 말랐다. 시원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싶었다. 그녀에게 전화했지만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다음 날까지, 아니 다음다음 날까지, 아니 다음다음 날의 또 다음 날까지. 얼마 뒤 성적이 발표됐다. 그제야 그녀는 먼저 연락을 해왔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대뜸 삼수를 하겠다고 했다. 절박한 목소리로, 꼭 해야 한다고 했다.

꼭 쥔 손은 서로를 알아본다
며칠이 흘렀고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버스를 탔다가 우연히 학원을 지나치게 되었다. 여름철에 모자를 줬던 그 카페에서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커플 벙어리장갑”을 나눠주고 있었다. “벙어리장갑 속 손”이 어떤 모양일지 궁금했다. 어느 한 손이 다른 한 손에 살며시 다가가 그것을 잡는 생각을 해보았다. 서로를 알아보듯, 그리워하듯 말이다. 문득 모든 행운이 다 행복에 가닿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굳게 쥐었던 손을 쫙 펴보았다. 크리스마스에 나는 혼자였고, 장갑은 한 켤레도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맨손으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받았다. 작정한 듯 차가웠다. 그해는 그렇게 녹기 시작했다. 물처럼 공기처럼, 흐르다 기화했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주간동아 843호 (p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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