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케이팝(K-pop) 전성시대이고, ‘아이돌스타’ 세상이다. ‘아이돌스타’는 10대 청소년이 우상처럼 떠받드는 대중문화 속 인기 스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틴 아이돌(teen idol)’일 테지만 올바른 용어야 어떻든 아이돌스타의 인기는 ‘한류’까지 더해지면서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보아는 서곡이었고 드라마 ‘겨울연가’는 충격이었으며 케이팝을 따라 부르는 유럽 청년의 모습은 차라리 기적이었다.
조잡한 화질의 일본 애니메이션 비디오테이프 복사본을 보고, 브룩 실즈와 소피 마르소의 사진 책받침을 내 몸같이 아꼈으며, 저우룬파와 장궈룽의 홍콩 누아르에 열광한 세대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풍경이 세계 각국에서 펼쳐진다. 일본 음반과 DVD 판매 순위 차트인 오리콘이 ‘가요 TOP10’처럼 익숙해진 지 오래고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청소년이 한글 팻말을 들고 한국 아이돌스타의 춤과 노래를 흉내 내는 일은 이제 얘깃거리도 안 된다.
지난해 6월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 동방신기 등이 프랑스 파리에서 2회에 걸쳐 대규모 공연을 펼친 이후 1년여 동안 케이팝 스타들은 미국, 유럽, 남미에서 콘서트와 TV 출연을 이어가며 ‘케이팝 인베이전(K-pop invasion)’이라 부를 만한 현상을 만들어냈다. 일본을 배경으로 한 ‘한류’ 혹은 ‘한류 4대 천왕’(배용준, 장동건, 이병헌, 원빈) 같은 단어는 이제 흘러간 노래가 돼버렸다.
‘SM타운 라이브 월드 투어’ 공연 실황
한류는 이미 아시아를 벗어났고 그 중심엔 케이팝과 아이돌스타가 있다. 아이돌스타는 거대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원 소스 멀티유스(One source multi-uses)’가 된다. 예를 들어 소녀시대 멤버 9명은 따로 또 같이 활동하면서 가수와 공연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등 각 영역에서 주인공으로 뛴다. 이는 연예기획사가 운영하는 오디션-연습생 제도와 함께 한류만의 독특한 스타 시스템 덕분이다.
최근 주목할 만한 또 한 가지는 ‘아이돌스타 시스템’ 자체가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가 TV 드라마 ‘드림하이’다. 배우 배용준이 만든 키이스트와 가수 박진영의 JYP엔터테인먼트가 합작하고 아이돌그룹 멤버가 대거 출연한 ‘드림하이’는 기획, 제작은 물론 출연과 소재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케이팝 스타’에 초점을 맞췄다.
지난해 여름 개봉한 공포영화 ‘화이트 : 저주의 멜로디’도 스타덤에 오른 아이돌그룹 이면에 담긴 냉정한 업계 생리와 멤버 간 경쟁 및 갈등을 그렸다. 걸그룹 티아라의 리더 함은정이 주연을 맡았다. 아이돌스타를 아예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 ‘Mr. 아이돌’도 있었다. 지상파와 케이블을 막론하고 인기를 이어가는 오디션 프로그램 역시 케이팝 스타 혹은 아이돌스타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가 타깃이라고 한다. 이렇듯 한국 엔터테인먼트산업의 스타 시스템에서 아이돌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I AM’은 아이돌스타가 중심에 있는 2012년 한류 스타 시스템의 정점을 보여준다. 보아와 강타를 필두로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f(x) 등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이 지난해 10월 23일 미국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펼친 ‘SM타운 라이브 월드 투어’ 공연 실황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유노윤호, 최강창민(이상 동방신기), 이특, 예성, 신동, 성민, 은혁, 동해, 시원, 려욱, 규현(슈퍼주니어), 태연, 제시카, 써니, 티파니, 효연, 유리, 수영, 윤아, 서현(소녀시대), 온유, 종현, Key, 민호, 태민(샤이니), 빅토리아, 엠버, 루나, 설리, 크리스탈(f(x))의 얼굴을 뉴욕 스카이라인을 이루는 대형 전광판과 합성해 일일이 클로즈업하고, 본명과 함께 예명을 새기며 영화는 시작한다. 부르기도 벅찰 만큼 많은 가수의 얼굴과 이름을 첫머리에서 장황하게 보여주는 이유는 그 자체가 이후 2시간 동안 펼쳐질 영화 내용에 대한 방향지시등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친구, 스타들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습니다.’
카메라가 긴장과 정적이 감도는 백스테이지를 거쳐 SM엔터테인먼트 수장인 이수만 대표의 공연 성공기원 기도를 잠깐 훑으니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가 울려 퍼진다. ‘팬 여러분, 당신들의 소원이 이 영화 속에 있습니다.’
스타들의 10여 년 전 모습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공연실황과 스타 인터뷰, 데뷔기, 연습생 시절을 교차한다. 아이돌스타가 무대 위 화려한 모습과 10대 혹은 20대 평범한 젊은이 사이에서 겪는 정체성의 혼돈과 갈등을 털어놓는 대목, 그리고 학교와 연습실만 오가며 수년을 버틴 과거 시절을 떠올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하지만 아이돌스타의 ‘육성’이라는 점 외에 특별히 새롭거나 깊이 있는 고백은 없다. 다만 그들이 멀게는 10여 년 전인 초중교 시절 오디션에 응시해 춤추고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나 풋풋했던 연습생 시절을 담은 동영상이 팬의 눈길을 끌 만하다.
‘I AM’은 한국보다 일본, 대만, 홍콩, 인도네시아, 싱가포르에서 먼저 개봉해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두말할 나위 없이 국내외 케이팝 팬에 대한 확실한 ‘서비스’다. 한류의 새로운 ‘기획 상품’으로서도 가능성을 확인했다.
하지만 음악다큐멘터리로서는 TV 가요프로그램의 극장판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휴먼다큐멘터리로서도 스타의 진솔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깊이 있게 담아내는 데 실패했다. 독자적인 영화예술로 접근하기보다 철저하게 스타 시스템에 기반을 둔 산물이다. 그래서 영화엔 주인공이 아닌 팬 혹은 제3의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팬 혹은 관객이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SM엔터테인먼트와 투자배급사인 CJ E·M, 그리고 아이돌스타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담았다.
무엇이 초등학교 5학년생을 춤과 노래에 미쳐 기획사 오디션에 도전하게 만들었는지, 경쟁자가 숱하게 낙오하는 수년간의 연습생 시절을 버티게 한 열정의 정체는 무엇인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동생이나 조카, 아들딸이 왜 그들에게 열광하는지 공감해보려고 극장을 찾은 기성세대에겐 아쉬움이 남을 만하다. 아이돌그룹 멤버의 이름과 얼굴을 더 알게 된 게 소득이라면 소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