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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포도원 기행

고단한 인생의 짐 와인아 너는 알고 있지?

빔바젠의 포도원

  • 박일원 호주여행전문칼럼니스트 bobbinhead@gmail.com

고단한 인생의 짐 와인아 너는 알고 있지?

‘포도원 기행’은 와인에 대한 천편일률적 지식이나 이론 혹은 까다로운 예법을 따지는 기존 와인 이야기와는 다르다. 호주의 유명 와인 산지를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생과 와인 이야기를 담았다. 전직이 판사, 의사, 신문기자, 화가, 항공기 조종사, 철학 교수인 양조장 주인으로부터 포도농장을 하게 된 동기, 그리고 와인에 대한 독특한 인생철학과 애환, 사랑 이야기를 직접 듣고 채록했다.

술 익는 마을에 내려앉은 낭만

고단한 인생의 짐 와인아 너는 알고 있지?
빔바젠의 언덕을 오른다. 헌터밸리에 산재한 포도원들이 노을빛에 젖은 채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온 동네가 하나의 커다란 술통처럼 보이고 와인 향기가 코끝에서 물씬 풍기는 듯하다. 갑자기 박목월 시가 떠오른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중략)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그곳 ‘남도 삼백 리’에서처럼 헌터밸리에도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 포도밭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와인에 취하고 노을빛에 감동하는 평화로운 저녁시간. 하루 일과를 얼추 마친 사이몬이 소비뇽 블랑을 들고 나와서 따르자 노을빛도 함께 쫓아와 와인잔에 머문다. 진한 과일 향이 상큼하고 깔끔하다. 사이몬이 “섬세한 뒷맛을 즐기려면 안주 없이 마셔야 좋다”며 와인 병에 붙은 라벨을 보여준다.



“빔바젠에서 만든 와인 중 일부는 이처럼 유명 화가의 그림이 라벨에 그려 있습니다. 와인과 미술을 접목해 상호이해를 도모할 목적으로 기획한 것인데 호주 현대미술관의 유명 아티스트가 거의 참가하고 있죠.”

그 대신 빔바젠은 와인 판매가의 10%를 예술교육프로그램을 위해 미술관 측에 기부한다. 와인업계와 미술계의 동반 발전을 꾀하는 일이라지만 낭만적인 시도임이 분명하다.

한낮의 더위가 한풀 꺾인 밤이 되면 잎이 무성해진 포도밭 사이로 와인 병을 든 연인이 하나 둘 포도원으로 찾아들기 시작한다. 잔디밭에 앉거나 비스듬히 누운 채 쿨러에서 방금 꺼내 이슬이 맺힐 정도로 차가운 와인을 따라 마시며 낭만의 밤을 보내기 위해서다.

빔바젠 종탑은 세상살이 프리즘

고단한 인생의 짐 와인아 너는 알고 있지?

빔바젠의 포도밭 일꾼들. 가지치기할 때가 가장 힘들다고 한다.

종탑 위로 밤하늘을 가르며 별똥별이 지나가고 나면 물씬 풍겨오는 짙은 포도 향과 짝짓기 상대를 찾는 풀벌레의 고혹적인 울음소리가 슬금슬금 몸을 간질이기 시작한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에서처럼 그런 깊은 밤중에는 또 다른 신비스러운 세계가 고독과 적막 속에서 새롭게 눈을 뜬다. 고요했던 포도밭 여기저기서 수군거림과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어 습습한 밤안개가 사방을 에워싼다. 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밤이다. 왜냐하면 여기는 딸기밭이나 수박밭처럼 키 낮은 과수원이 아니다. 한 계절이 지나는 사이 잎이 무성해질 대로 무성해진 포도덩굴이 사방을 가려주는, 욕망과 사랑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신비스럽고 탐스러운 포도밭이다.

그렇다고 포도원에서 매일 낭만적인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화나는 일도 생기고, 제대로 일이 안 풀려 답답한 적도 있으며, 때로는 집착이나 허영에 사로잡혀 현재 하는 일이 심드렁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벤치에 앉아 노을에 타오르는 빔바젠의 포도원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사이몬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준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가을이었다고 한다. 포도원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일하는 사람이 꽤 많았고 그래서 누가 누군지 알 수도 없었던 시절의 회상이었다.

“사람을 사귀기도 쉽지 않았어요. 여기저기서 몰려온 뜨내기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매일 한두 번은 크고 작은 싸움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엔 정말 싸움다운 싸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사내가 서부 활극에서처럼 포도원 마당 양쪽에서 나타나더니 마치 코뿔소가 된 양 먼지를 일으키며 서로를 향해 달려오는 겁니다. 그러곤 두 행성이 충돌하는 것처럼 중간에서 꽝하고 부딪쳐 그때부터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대며 피 터지게 싸우더군요.”

그런데도 싸움이 흔한 일이라 그런지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고 다들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먼지가 뽀얗게 이는 마당에서 대판 싸우던 사람들이 지쳤는지 나가떨어지고 나서야 싸움은 비로소 끝이 났다. 뭔 원수진 일이 있어 저렇게 무섭게 싸우나 하고 주위 동료한테 물어봤더니 “흔한 일이다. 그렇게 죽어라 패며 싸운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라고 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그렇게 무식하게 싸우다니….

아마도 고된 노동에서 비롯한 스트레스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 한적한 곳에서의 외로움과 고독,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의 권태를 그렇게 풀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잘 익어 맛있는 와인이 항상 옆에 놓여 있었다는 점. 와인을 만들다 와인 때문에 싸우는 이들이지만 저녁이면 소박한 인생의 울화통을 와인으로 풀었다. 한 병의 와인은 몸 안에 흘러내리는 빗물처럼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처를 어루만져 분노를 삭일 수 있게 해준다. 결국 그들은 와인 때문에 화해하고 와인 덕분에 그곳을 떠나지 못한 채 함께 일하며 살 수 있었다.

이따금 트렁크에 잔뜩 짐을 실은 고물차가, 보랏빛 자카란다가 빔바젠으로 들어온다. 만개한 외줄기 길을 지나 붉은색 흙이 깔린 정문을 통과해서…. 이곳저곳 포도원을 돌아다니며 별의별 경험을 다한 농사꾼이나 사이몬처럼 노련하고 숙련된 와인 고수들이 일자리를 찾아 언덕을 올라오는 것. 그러다 한철 포도원 일이 끝나면 그들 중 일부는 짐을 꾸려 술 익는 마을을 뒤로하고 또다시 나그네가 돼 길을 떠난다. 언젠가는 풀어놓을 줄 알았던, 하지만 결코 내려놓지 못하는 고단한 인생의 짐을 다시 지고 떠나는 것이다. 그래도 헌터밸리에 찾아와 와인을 마시며 시름을 달랠 수 있었다면 그 나름대로 행복하지 않겠는가.

빔바젠의 종탑에는 사방으로 커다랗게 네 개의 창문이 나 있다. 그 창을 통해 낭만의 밤을 포도넝쿨 아래서 보내려고 찾아오는 연인의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다. 허름하고 소박한 인간과 고단한 나그네의 삶도 엿볼 수 있다. 빔바젠의 종탑 창은 다양한 인생을 보여주는 만화경인 동시에 세상살이의 단면을 투사하는 프리즘이다.



주간동아 2012.01.30 822호 (p64~65)

박일원 호주여행전문칼럼니스트 bobbinhea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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