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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은의 vitamin 詩

서울, 이방인에 더 시린 겨울

서울, 이방인에 더 시린 겨울

서울, 이방인에 더 시린 겨울
아임 스트레인지 히어

먼저 강을 제대로 건너는 일부터 시작해

이토록 거대한 이정표를 본 적이 없지

입이 벌어졌고 오누이는

아직 훈련이 덜 된 것 같다



영어 학원에 다녀야겠어, 동생은 부드러운 사투리로

말했고 그것은 실패를 인정하는 어투

오누이는 손이 닿지 않는 등의 복판을

손가락을 굽히고 긁는다 더듬이가 돋고

손과 발이 구분 없이 움직이고 넋 놓아

있는 순간 지구의 생태는 이미 바뀌어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몇 번이고

주말의 리모컨처럼 돌고 있다

머리 가슴 배

머리 가슴 배

머리 가슴 배

셋으로는 부족해

오누이는 훈련이 필요하다

강을 가로지르는 구부러진 다리를 따라

사람이 되기로 한다 이정표를 바로 본다

볼 때마다 새로운

반짝이는 저 보폭

이 강을 제대로 건널 수 있을까

당신은 훌륭한 것 같다

성실하게 훈련받은 티가 난다

오누이는 영어를 배우러 가고

작은 차를 팔아 버리고

서로의 등에서 더듬이를 뽑아내며 다리를 건너며

다짐해

다음에는 무엇보다

지구에서 태어나지 말자

― 서효인,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민음사, 2011)에서

서울, 이방인에 더 시린 겨울

소읍에서 “오누이”가 상경한다. 오누이가 아니라 형제자매라도 상관없다. 진눈깨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오후, 오누이는 서울에 도착한다. 양손에 바리바리 짐을 들고. 지하철을 빽빽이 메운 사람을 보니 덩달아 바빠진다. 마치 자신들도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꾼이 된 것 같다. 길을 물어물어 앞으로 살 집을 겨우겨우 찾아간다. 서울이 이렇게 큰 도시인 줄은, 이런 대도시에도 달동네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 저녁, 오누이는 사이좋게 라면을 끓여 먹는다.

라면을 다 먹고 자리에 누우니 기분이 요상하다. 배는 부른데 배 속은 헛헛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하기만 하다. 오누이는 머리를 맞대고 먹고살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일자리는 “손이 닿지 않는 등의 복판”처럼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등이라도 긁어줄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오누이는 얼굴을 마주 보고 씩 웃는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니다. 오누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헛구역질을 한다. 때마침 연탄불이 꺼진다. 일분일초를 견디려면, 이 대도시에서는 돈이 필요하다. 절실하다.

다음 날부터 오누이는 본격적으로 생존 “훈련”을 한다. 스스로에게 모질고 혹독해진다. 하루에 몇 시간씩 “사투리” 고치는 연습을 하고, 어떻게든 ‘표준’이 되려고 아득바득 애쓴다. 이 땅에서 “사람”이 되려면 스펙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매일매일 “주말의 리모컨”이 돼 아침에는 집에서 학원으로, 점심에는 학원에서 일터로, 밤에는 일터에서 집으로 간다. 늦은 밤,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지하철에서 모기만 한 목소리로 자문하기도 한다. “이 강을 제대로 건널 수 있을까.” 걱정의 끝은 강의 끝처럼 쉬 보이지 않는다. 소리 없이 가슴에 격랑이 인다.

서울, 이방인에 더 시린 겨울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이 걱정은, 이 격정은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 앞에서 오누이는 언제나 작고 왜소한 존재다. 이 복잡한 땅에서 우리의 길을 이끌어주는 “이정표”는 없다. 초록 별 “지구”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만원 지하철 안,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멍하니 밖을 내다본다. 이 검푸른 강에서, 너와 나는 어쩌면 한 다리 건너 오누이일 수도 있다. 머잖아 “훈련”을 같이 받을 동료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입김을 불어 꽁꽁 얼어붙은 손을 함께 녹이자. 여기는 낯선 곳이니까, 어디에 있어도 이방인 같으니까. 그래도 오누이여, 순순히 “실패를 인정하”지는 말자. 이 겨울, 그건 가장 무겁고 차가운 눈송이일 테니까.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주간동아 820호 (p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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