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6

2011.07.18

프랑스판 ‘살인의 추억’이 뭐기에

‘오마르가 나를 죽였다’ 영화 개봉 화제…정원사 오마르 사건 미스터리 밝혀지나

  • 파리 = 백연주 통신원 byj513@naver.com

    입력2011-07-18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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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판 ‘살인의 추억’이 뭐기에

    영화‘오마르가 나를 죽였다’의 주인공(왼쪽 큰 사진)과 홍보 포스터. 사건 발생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6월 22일 프랑스인이 기다리던 영화 ‘오마르가 나를 죽였다’(원제 Omar m’a tuer)가 개봉했다. 프랑스 명배우 출신 로시디 젬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왜 프랑스 사람은 이 작품에 그토록 관심을 가질까. 이 영화의 소재가 된 사건 때문이다.

    사건은 1991년 6월 24일 월요일 저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칸 근처 무장지역에 살던 프랑신 파스칼이라는 여성이 경찰에 “매일 보던 이웃 지슬렌 마르샬이 보이지 않는다”고 신고했다. 사건을 접수한 경찰은 지슬렌 자택을 수색하던 중 지하창고에서 들보로 구타당하고 칼에 수차례 찔려 사망한 지슬렌을 발견했다. 놀라운 것은 창고 입구의 하얀 문에 그가 피로 써놓은 마지막 메시지였다. ‘Omar m’a tuer(오마르가 나를 죽였다).’

    경찰은 신고자 프랑신을 통해 오마르의 정체를 밝혀냈다. 그는 프랑신과 지슬렌이 고용한 모로코인 정원사 오마르 라다드라였다. 경찰은 오마르를 추적했고, 6월 25일 저녁 툴롱지역 장모 집에 머물던 그를 체포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 엇갈리는 진실

    경찰은 지슬렌이 6월 23일 오전 11시~오후 1시 30분에 사망한 것으로 공식 발표했다. 경찰이 체포한 오마르는 알리바이를 내세우며 결백을 주장했다. 오마르는 사건 당일 프랑신 집에서 정원 일을 하다 점심시간인 12시~1시 10분에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빵을 사러 들렀던 제과점과 오가는 길에 만났던 이웃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하지만 살인 혐의를 벗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찰은 평소 오마르가 카지노에 자주 출입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오마르는 도박에 중독자 수준으로 빠져 매달 돈을 잃는 바람에 월세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프랑신과 지슬렌에게 수차례 가불을 부탁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은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월급을 미리 받길 원했던 오마르가 지슬렌과 다툼 끝에 그를 살해한 것으로 결론 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1994년 2월 오마르에 대한 재판이 시작했다. 언론과 여론이 그를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가운데 오마르는 무죄라고 계속 주장했다. 시간대별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2시 정각 프랑신의 집에서 일을 마치고 나와 12시 5분 근처 제과점에 도착했다. 제과점엔 여직원 한 명과 남자 한 명이 있었다. 빵을 구입한 후 12시 15분 카네에 있는 집에 도착했고, 오토바이를 세우면서 한 이웃과 마주쳤다. 12시 40분 점심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와 근처 공중전화에서 아내와 통화했고 다시 프랑신의 집으로 돌아와 1시 30분부터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경찰이 제과점을 조사한 결과 그 날 매장에는 두 명의 여직원만 근무했고 남자는 없었으며, 자택 앞에서 마주쳤다는 이웃은 그를 그 시간에 본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로써 오마르의 알리바이는 무너졌다.

    오마르의 진술과 경찰의 반박에는 비밀이 숨어 있었다. 프랑신 자택 부근에는 두 곳의 제과점이 있었고 오마르가 평소 찾던 제과점은 경찰이 찾아갔다는 매장에서 100m가량 떨어진 다른 곳이었다. 두 곳 모두 방문했다는 경찰의 주장은 제과점 사장 마르셸 모르틸리엔고가 거짓이라고 증언했다.

    오마르의 변호는 자크 베르제가 맡았다. 그는 다양한 증거를 내세워 오마르의 결백을 주장했다. 자크 변호사는 먼저 ‘오마르가 나를 죽였다’라는 피의 메시지를 지적했다. 프랑스어 문법에 따르면 ‘Omarm’a tu?’가 맞는 문장으로, 평소 지성인으로 인정받던 지슬렌이 단순한 문법을 실수할 리 없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 직전에 그렇게 문장을 쓸 만큼 힘이 남아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게다가 추가 조사 결과, 그의 손가락과 손톱에는 어떠한 혈흔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공식 발표한 사망시간에도 문제가 있었다. 부검을 담당한 3명의 의사는 지슬렌이 6월 24일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력 용의자 오마르가 24일에는 툴롱에 머물렀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망 날짜 자체를 23일로 위조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경찰은 오마르 외에는 어떠한 인물도 용의선상에 올리지 않았다.

    또한 경찰은 지슬렌 자택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그의 카메라에 담긴 마지막 필름을 모두 없앴다. ‘중요하지 않은 물품’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에서다. 자크 변호사는 그 외에도 오마르가 주장한 알리바이 중 일터로 돌아가기 전 공중전화에서 아내와 통화했다는 부분을 전화국 협조로 증명해냈다.

    그러나 법정은 끝내 오마르의 편이 아니었다. 그에게 징역 18년형을 선고했다.

    오마르는 죽이지 않았다?

    오마르가 유죄를 선고받은 후 자크 변호사는 드레퓌스 사건에 빗대어 “100년 전에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마그레브 출신이기 때문에 유죄선고를 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모로코 핫산 2세 국왕의 측근들이 지원하는 사설탐정들과 협력해 끝까지 오마르의 결백을 밝혀내기로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질랜드 여인 파트리시아 클라크가 자크 변호사를 찾아왔다. 지슬렌 살인사건이 일어날 당시 현장 근처에 거주하던 그는 “뒷좌석에 들보를 실은 트럭이 피가 묻은 채 지나갔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 증언을 무시했다. 파트리시아 이웃 중 트럭을 소유한 사람이 있었지만 사건 당일 작업에 필요한 나무와 붉은색 색소를 운반했음이 밝혀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얼마 후 사설탐정 베르나르 나란조가 지슬렌 자택에서 15km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오마르가 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그 오마르는 피해자와 전혀 연관이 없었다. 또 다른 증언도 있었다. 1995년 9월 모하메드 무멘이라는 전 수감자는 “감옥 동료가 지슬렌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증언도 상황을 역전시키지 못했다. 경찰은 사건을 수사할 당시 “집 안에 도둑이 든 흔적은 없고 보석과 현금도 그대로였다”는 점을 들어 “전 수감자의 증언은 거짓”이라고 반박했다.

    거듭되는 불확실한 증인과 증거에 지쳐가던 오마르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1996년 5월 10일 프랑스를 방문한 핫산 2세 국왕이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게 오마르의 감형을 요청한 것이다. 시라크 대통령은 모로코에 수감 중인 프랑스 범죄자의 감형을 조건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명확한 거주지와 직장을 명시한다는 조건으로 오마르는 1998년 9월 4일 가석방됐다.

    오마르에게 석방은 중요하지 않았다. 법원은 그가 신청한 재심 서류를 매번 거부했다. 무죄를 줄기차게 주장하던 그는 45일간이나 단식하고, 칼날을 삼켜 자살을 시도하는 등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2000년 2월 2일 마침내 법원은 ‘오마르가 나를 죽였다’사건을 재수사하기로 결정했다.

    수사담당관 안 비소티와 프랑수아즈 리치 다르누는 약 150쪽 분량의 보고서를 통해 “창고 문에 남은 메시지를 지슬렌이 작성한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2001년 2월 20일엔 살인 현장 지하창고에서 두 성인 남성의 DNA를 발견했다. 물론 오마르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DNA가 오마르의 무죄를 밝히기엔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사건의 마지막 기록은 2008년 자크 변호사가 확보한 새로운 사실로 다시 재심을 신청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오마르 살인사건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한국영화 ‘살인의 추억’처럼 이 영화는 “도대체 범인은 누구인가”를 관객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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