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음직스러운 설렁탕.
“조선 태조 때부터 동대문 밖 전농동(典農洞, 현 동대문구 제기동) 선농단에 적전(籍田)을 마련하고 경칩(驚蟄) 뒤 첫 번째 해일(亥日)에 제(祭)를 지낸 뒤 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농사의 소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의식을 행했다. (중략) 행사 때 모여든 많은 사람을 대접하기 위해 쇠뼈를 고은 국물에 밥을 말아낸 것이 오늘날의 설렁탕이라고 한다. 선농탕이 설렁탕으로 음(音)이 변한 것이다.”
최근 한 식품회사에서 설렁탕 제품을 내면서 돌린 자료도 이런 내용을 담았고, 많은 언론이 그대로 옮기고 있다. 설렁탕의 선농단 유래설은 한때는 그냥 ‘설’일 뿐이었다. 그 ‘설’이 잘못됐다는 근거 있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음식문화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고(故) 이성우 교수는 1982년 ‘한국식품문화사’라는 책에서 이 ‘선농단 설’을 콕 찍어서 “억지”라고 평했다.
“영조(1724~1776) 대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몽골어 사전인 ‘몽어유해(蒙語類解)’에 따르면, 몽골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어 끓인 것을 ‘空湯(공탕)’이라 적고 ‘슈루’라 읽는다. 맹물에 소를 넣고 끓인다면 곰탕이나 설렁탕의 무리다. 따라서 곰탕은 ‘空湯’에서, 설렁탕은 ‘슈루’에서 온 말이라고 봤으면 한다. 오늘날의 곰탕과 설렁탕은 동류이종일 따름이다. 설렁탕을 선농단에 결부하는 속설은 아무리 생각해도 후세의 억지 설인 듯하다.”
서울스토리텔링연구소 이종수 소장은 ‘우리나라와 몽골의 음식문화’라는 소논문에서 몽골의 탕 문화를 좀 더 소상히 적고 있다.
“몽골의 설렁탕은 대형 가마솥에 소 2마리, 양이나 염소 12마리를 통째로 끓여 쇠고기를 잘게 썰어 소금을 넣고 끓인 공탕(s〃ulen)이다. 공탕은 전쟁터에서 군사(특히 기마병)들의 식사를 해결하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설렁탕이 선농단에서 유래했다고 하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한반도의 음식문화 중 가장 흥미로운 관계가 형성됐던 ‘고려-몽골’의 음식문화 교류사를 왜곡할 수도 있다. 고려시대 우리 민족은 불교를 믿었고 육식을 금했다. 고려인들은 몽골인에게서 소를 잡는 법을 배웠고, 이 소로 음식 만드는 방법도 배웠다고 한다.
몽골의 슈루는 한국의 설렁탕과 다를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자기 민족의 입맛에 맞게 변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설렁탕은 근래에 급격히 변하고 있다. 20년 전 설렁탕은 쇠고기의 온갖 부위를 다 넣고 끓였다. 그러니 누린내가 심했다. 누린내는 내장, 쇠머리에서 특히 많이 난다. 1990년대에 들면서 이 부위를 뺀 설렁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사태에다 잡고기를 적당히 섞어 끓이는 방법도 등장했다. 쇠뼈도 사골만 쓰는 집이 생겼다. 설렁탕 맛이 점점 고급스럽게 변해가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공장형 설렁탕 또는 곰탕이 크게 번지면서 옛 맛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기도 한다. 쇠뼈를 넣고 국물을 제대로 우려내려면 가마솥에서 12시간 이상을 끓여야 하는데, 공장에서는 고압솥을 이용해 두어 시간 만에 국물을 뽑아낸다. 이렇게 해서는 제맛이 날 수 없다. 또 기름을 일일이 걷어내야 하는데 이 작업이 귀찮고 힘드니 균질기를 이용하며 기름을 잘게 쪼개 국물 속에 흩어버린다. 이 기름 때문에 고소한 맛이 더 날 수는 있지만 건강에 좋지 않다.
음식은 장사와 사업의 ‘거리’이기도 하지만 문화다. 그 음식에 담긴 역사며 맛에 대해 지킬 것은 지키면서 장사도 하고 사업도 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