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5

2010.09.20

기발한 상상력 따라가다 가슴이 뭉클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 ‘마루 밑 아리에티’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10-09-20 1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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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발한 상상력 따라가다 가슴이 뭉클
    일본 애니메이터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 중 누가 더 좋은지 물어보는 것은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와 ‘에릭 클랩튼’ 중 누가 더 좋은지, 또는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 중 누가 더 좋은지 묻는 것과 비슷하다. 두 사람은 애니메이션의 명가 ‘지브리 스튜디오’를 이끌며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황금기를 누렸다.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는 제작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했지만 감독은 다카하타 이사오인 듯한 이중적인 느낌을 준다. 웅혼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하야오에 비해 ‘빨간 머리 앤’ ‘추억은 방울방울’ ‘이웃집 야마다군’을 연출한 이사오 감독은 아기자기하고 섬세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마루 밑 아리에티’가 딱 그렇다. 빨간 머리 앤이 소인(小人)으로 빙의한 듯한 10cm의 빨간 머리 소녀 아리에티와 심장병을 앓는 소년 쇼우의 우정은 하야오의 플롯이나 그림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잔잔하다.

    일본의 고택. 심장병에 걸린 쇼우는 방학을 맞아 외할머니 댁에 놀러 온다. 그 집의 마루 밑에는 인간에게 자질구레한 물건을 빌려 쓰며 살아가는 소인족 ‘아리에티 가족’이 있다. 고양이나 생쥐의 위협이나 인간의 눈을 피해야 하는 고단한 삶에도 아리에티 가족은 각설탕, 휴지, 과자 등을 인간에게 몰래 빌려 쓰며 아기자기한 삶을 영위한다. 어느 날 어머니의 생일선물로 월계수 꽃을 꺾던 아리에티는 쇼우의 눈에 띄면서, 인간에게 절대 들키면 안 된다는 가족의 계율을 지킬 수 없게 됐다. 이제 아리에티는 쇼우를 만나러 위험천만한 모험을 감수한다.

    자상하지만 근엄한 아버지, 명랑하고 낙천적인 어머니. 모험심 강하고 의지가 굳은 딸 아리에티는 일본의 전통가족을 저절로 떠오르게 한다. 일본 영화나 문학에 자주 나오는 다소 이상화된 전통가족은 그러나 애니메이션 속에서 의미심장하게도 ‘사멸’해가는 중이다. 아들이 심장병을 앓는데도 어머니가 바쁘다며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쇼우 가족은 분열되고 분자화한 현대의 일본 가족을 상징한다.

    쇼우와 아리에티는 개인 또는 종족이, 개체 또는 계통이 지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쇼우는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혈육의 온기를 지닌 이 소인 가족을 음으로 양으로 지켜주고 싶다. 쇼우가 준 각설탕은 소인 가족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 게다가 그가 아리에티 가족에게 주기를 바라는 인형의 집도 쇼우의 엄마가 소원하는 부엌을 지니고 있다.



    특히 소인의 눈으로 본 인간의 확대된 세상이나, 작은 못이 계단이 되고 재봉 핀이 펜싱 검이 되는 소인국만의 독특한 생활방식은 ‘신드바드의 모험’이나 ‘애들이 줄었어요’ 같은 공상과학 영화를 다시 체험하는 듯 기발한 상상력으로 채워져 있다. 다만 ‘마루 밑 아리에티’의 마지막은 뭔가 허전하고 허무하다. 쇼우가 심장병을 앓는다는 설정도, 아리에티 가족의 위기도 담담한 플롯에 묻혀 이전의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은 감흥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마루 밑 아리에티’를 보면 행복해진다.

    이 작품으로 데뷔한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은 수작업의 질감을 최대한 살린 2D 셀 애니메이션으로 잊혀가는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의 향취와 세밀함을 되살려냈다. 할리우드가 양산하는 3D 디지털 애니메이션이 주류가 돼가는 상황에서, 소인국 주인공들도 일본의 전통 집도 그리고 셀 애니메이션 기법도 모두 점점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아리에티를 다시 본다는 것은 아스라한 향수를 잡는 행위다. 모처럼 어린 시절 TV만화를 추석 극장에서 보는 듯한 낡은 필름의 냄새에 저절로 취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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