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4

2010.07.05

깨방정 숙종, 알고 보면 카리스마 넘쳤다

격동의 시기 탕평책으로 정국 주도… ‘이서방’으로 백성들과 적극적 소통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10-07-05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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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방정 숙종, 알고 보면 카리스마 넘쳤다

    드라마 ‘동이’의 주요 등장인물. 왼쪽부터 장희빈(이소연 분), 어린 시절의 동이 친구 게둬라(최수한 분), 동이(한효주 분), 동이 아역 (김유정 분), 숙종(지진희 분). 조선조 21대 영조의 생모이자 19대 숙종의 후궁이었던 천민 출신 숙빈 최씨의 파란만장한 삶과 아들 영조의 성장과정을 그린 드라마다.

    역사 드라마 ‘동이(同伊)’가 시청자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동이’는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년 8월~1720년 6월)과 천민 무수리 출신으로 후궁이 된 숙빈 최씨(최동이, 1670~1718)의 러브 스토리다. 이 드라마에서 숙종은 근엄한 군주가 아닌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캐릭터로 내시와 궁녀들에게 허심탄회하게 농담을 건네는 파격적 장면을 보여준다. 동이도 궁중음악과 무용을 관장하는 예조의 속아문(하급전문관청) 장악원(掌樂院)에서 일하는 현대판 연예인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시청자들은 ‘동이’ 드라마를 통해 친밀해진 숙종을 ‘깨방정 숙종’ 또는 ‘허당 숙종’으로 부르며 이해한다니 드라마의 위력이 간단하지가 않다. 그러면 숙종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드라마가 아닌 역사 속의 숙종을 만나보자.

    1674년(현종 15) 8월 18일 갑인(2차) 예송논쟁 중 부왕 현종(1641~1674, 재위 1659년 5월~1674년 8월)이 훙거하자 14세 세자 돈(焞)이 8월 2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니, 그가 조선 19대 국왕 숙종이다. 숙종은 1661년(현종 2) 8월 15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원자로 태어나 7세가 되던 1667년(현종 8) 정월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14세에 즉위해 45년 10개월을 집권하다 고질병인 안질로 왼쪽 눈을 거의 실명한 채 1720년(숙종 46) 6월 8일 보령 60세에 경덕궁 융복전에서 승하했다.

    양란 이후 조선 체제 정비작업

    숙종이 치세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은 양란 이후 총체적 난국기로 국가재조론(國家再造論)이 대두된 시기였고, 정치·외교·군사·경제·사회·문화 제 분야에서 일련의 변화가 진행되던 격동의 시대였다.



    정치적으로는 1575년(선조 8)의 을해당론에서 발단된 동·서인의 붕당정치가 100년을 넘어 남인(南人), 북인(北人), 노론(老論), 소론(少論)의 사색붕당 절정으로 이어지며 정국이 교체되는 여러 차례의 환국(換局)이 있었다. 특히 29세 청년 숙종이 기호학파의 종사이자 노론의 영수인 대로(大老)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사사한 것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을 군강신약(君强臣弱)으로 전환케 한 획기적 사건이었다.

    숙종은 이러한 환국정치에서 탕평책을 제기해 용사출척권(用捨黜陟權·왕이 정계를 대개편하는 권한)으로 붕당을 자주 교체하며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했다. 이 때문에 신료들의 정쟁은 격화됐지만 왕권은 오히려 강화됐고, 이러한 왕권을 바탕으로 양란 이후 조선 체제 전반의 복구 정비작업을 펼쳐 상당한 치적을 남길 수 있었다.

    외교적으로는 1712년(숙종 38) 청나라와 백두산 일대의 경계를 명백히 하는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했고, 일본에 두 차례(1682년, 1711년) 통신사를 파견해 수호를 다졌다. 특히 막부를 통해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음으로써 울릉도의 귀속문제를 확실히 했다. 그리고 숙종 연간에 동래 수군 출신의 안용복(安龍福)이 두 차례(1693년, 1696년)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한 민간외교 사건도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임진왜란 중 설치한 훈련도감을 필두로 마지막 금위영까지 5군영 체제를 확립, 임란 후의 군제 개편을 마무리했고 북한산성을 개축하고 강화 돈대를 축조했다. 또 양역(良役) 문제 해결 차원에서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을 반포해 양인 장정의 군포 부담을 1인 2필로 균일화함으로써 농민 부담을 절감했다.

    경제적으로는 방납제도의 폐단을 시정한 대동법(大同法)을 전국적으로 시행했고, 양란 후의 양전사업(量田事業)을 종결했으며, 상평통보를 조선 유일의 법화(法貨)로 채택해 전국적으로 유통시켜 조선 후기 상품 화폐경제 발전을 촉진했다.

    깨방정 숙종, 알고 보면 카리스마 넘쳤다

    숙종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사사해 군강신약(君强臣弱)의 계기로 삼았다.

    사회적으로는 양란 후 국가 재정 궁핍 타개책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는 공명첩(空名帖)이 발행돼 신분제 동요가 야기됐고,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심각했다. 연이은 흉년과 홍수, 질병 등으로 100만 명 이상의 인구가 감소했고, 이에 따라 일손이 부족하자 이앙법(모내기법)이 널리 보급됐다.

    1688년(숙종 14)에는 승려 여환(呂還) 등이 석가의 시대가 다하고 미륵의 세계가 온다는 미륵신앙을 매개로 왕조에 저항을 시도했고, 1697년(숙종 23)에는 황해도 구월산을 무대로 활동하던 창우(倡優) 출신 장길산(張吉山)과 농민군 세력이 더욱 커져서 서북지방이 대단히 어수선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이 분출돼 노비들의 저항으로 상전 가족을 살해하는 살주계(殺主契)와 검계(劍契) 같은 비밀결사가 조직되기도 했다.

    문화적으로는 ‘명분의리론’이 강조돼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을 복권시켰다. 또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켜 단종으로 묘호를 올리고, 소현세자빈으로 폐서인(廢庶人)됐던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으로 하는 등 왕실의 충역관계를 재정립하는 작업도 이뤄졌다.

    6명의 아내…‘플레이보이’기질도

    그러면 숙종의 여인과 가족관계를 살펴보자. 숙종은 젊은 나이에 국왕으로 재위한 탓인지 ‘플레이보이’ 기질을 보여 인경왕후를 비롯해 6명의 아내에게서 9명의 자녀를 뒀다. 인경왕후가 3녀를 두었으나 인현왕후와 인원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희빈 장씨는 경종(조선 20대 국왕)을 비롯해 1남1녀, 숙빈 최씨(동이)가 영조(조선 21대 국왕)를 비롯해 2남1녀, 명빈 박씨가 1남을 낳았다. 후궁으로는 역관이자 장안 갑부인 장현(張炫)의 종질녀 희빈 장씨(장옥정, 1659~1701)가 유명하나 드라마 ‘동이’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숙종의 여인을 찾아내 드라마틱하게 포장했다.

    최동이는 본관이 해주이고, 후일 영의정으로 추증된 최효원(崔孝元)의 딸이다. 궁중 나인에게 세숫물을 떠다 받치는 무수리로 입궐해 숙종의 승은을 입어 1693년(숙종 19) 4월에 숙원(淑媛, 종4품)이 돼 아들 영수(永壽)를 낳았으나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 그 후 인현왕후가 복위하던 해인 1694년(숙종 20) 9월에 연잉군(延君, 후일의 영조) 금(昑)을 낳고 숙의(淑儀, 종2품)에 올랐다. 이어 1695년(숙종 21) 귀인(貴人, 종1품)이 되고 1699년(숙종 25) 숙빈(淑嬪, 정1품)에 봉해져 내명부 최고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인현왕후 사후 동이는 장희빈 사사 후 빈이 후비(后妃)로 승격할 수 없도록 제정한 국법 때문에 왕비가 되지 못하고 49세에 죽었다.

    숙종은 14세의 유주(幼主)로 출발했지만 붕당정치의 갈등과 반목 속에서 점차 카리스마를 갖춘 군주로 변모했다. 어떻게 보면 숙종시대는 양극화의 극치였다고 볼 수 있다. 노회한 대신들과 피 말리는 파워게임을 하면서도 잦은 미행(微行)을 통해 국왕이 아닌 이서방(李書房)으로 백성과 소통했다.

    숙종시대는 사색붕당의 끊임없는 음모와 대립, 북벌론과 북학론의 충돌, 조정관료인 조시(朝市)와 재야지식인 그룹인 산림(山林)의 대립, 중전 민씨와 희빈 장씨의 궁중 암투, 장희빈 사사 후 아버지 숙종과 아들 경종의 갈등 등으로 아슬아슬했다. 숙종은 이러한 구도를 이용, 탕평책을 펼쳤지만 숙종 사후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울 것을 주장하는 신임사화(1721~1722년)로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이 처형되는 등 피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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