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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교수의 5분 세계사

뼛속까지 폴란드를 사랑한 ‘피아노 시인’

쇼팽, 망명 후 작사 등 폴란드어로 고집 … 죽어서도 시신은 프랑스, 심장은 바르샤바 교회에 안치

  •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뼛속까지 폴란드를 사랑한 ‘피아노 시인’

뼛속까지 폴란드를 사랑한 ‘피아노 시인’

음악을 통해 조국 폴란드의 고통과 슬픔을 표현하고자 했던 쇼팽.

올해는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쇼팽(Fre´de´ric Chopin·1810년 3월1일~1849년 10월17일) 탄생 200주년이다. 쇼팽의 조국 폴란드는 ‘피아노의 시인’으로 칭송받는 이 위대한 음악가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올해를 ‘쇼팽의 해’로 정하고 다채로운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지난달 하순부터 그의 생일이 있는 이달 초까지 수도 바르샤바에서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참가하는 기념 콘서트가 열려 그의 음악세계를 기렸다. 쇼팽에 대한 폴란드인의 존경심과 애정은 각별하다. 그의 삶과 음악이 폴란드의 민족적 전통과 애환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1810년에서 1849년까지 39년에 걸친 쇼팽의 생애는 유럽사에서 흔히 ‘복고(Restoration)’라고 일컫는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1815~1848년까지 이어진 ‘복고의 시대’는 빈(Wien) 회의와 더불어 시작됐다. 빈 회의는 그동안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반(反)프랑스 동맹세력, 즉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가 전후 처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개최한 국제회의다. 빈 회의를 지배한 것은 두 가지 원칙이었다. 그중 하나는 ‘세력균형’이었다. 세력균형의 원칙은 향후 유럽에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처럼 특정 국가가 지나치게 세력을 확대할 수 없도록 영토분할 등을 통해 견제한다는 것이었다. 유럽열강의 세력균형과 협력을 앞세운 빈 체제는 19세기 후반까지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유럽에 대규모 국제전쟁은 없었다.

빈 회의가 내세운 또 하나의 원칙은 ‘정통성(legitimacy)’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프랑스 혁명 이전 유럽의 전통과 구질서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정통성을 가진 구체제로 복귀하자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K. Metternich)를 비롯, 빈 회의를 주도한 유럽의 정치가들은 보수주의자였다. 그들은 지난 사반세기 동안 혁명과 전쟁이 초래한 정치·사회적 변화와 혼란을 종식시키고 왕정, 교회, 신분제를 통해 안정과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 구질서의 부활과 현상유지를 희망한 빈 회의의 보수정치가들에게 가장 큰 위협은 프랑스 혁명이 남긴 유산, 즉 그동안 혁명과 전쟁을 통해 유럽 전역에 전파된 자유주의 및 민족주의 이념이었다. 그들은 경찰과 군대 동원, 언론 검열 등 강압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복고 시대에 싹튼 자유주의·민족주의



빈 회의 이후 프랑스에서는 부르봉가(家)의 왕정이 부활했고, 스페인, 포르투갈, 시칠리아, 독일 여러 지역에서도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에 의해 물러난 지배자들이 권좌에 복귀했다. 그럼에도 빈 체제는 국제정치에서 평화와 세력균형을 달성한 것과 달리 구질서의 회복에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빈 체제는 1848년 유럽 전역을 휩쓴 혁명의 물결에 의해 최종 붕괴되기 이전부터 여러 차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의 저항에 부딪혀 흔들렸다. 1820년대 초에는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 나폴리와 피에몬트 지역에서 자유주의 봉기가 발생했고, 그리스에서는 터키의 지배에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투쟁이 시작됐다. 1830년에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해 부르봉 왕정이 무너지고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립의 7월 왕정이 들어섰으며, 벨기에에서도 혁명이 발생해 네덜란드에서 독립을 성취했다.

복고 시대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조류는 동유럽에서도 서유럽에 못지않았다. 특히 쇼팽의 조국 폴란드는 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민족주의의 열기가 충만했다. 폴란드가 당면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대략 10세기 후반 국가의 형태를 이룬 폴란드는 15~16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다. 한때 남으로는 흑해, 북으로는 발트해에 이르는 유럽 최대의 왕국을 이루었지만, 17세기 이후 쇠퇴하기 시작해 18세기 후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 완전히 분할 점령돼 독립국가로서 지위를 상실했다. 1807년에는 나폴레옹의 후견 아래 프로이센이 차지한 폴란드의 영토에 바르샤바 공국이 세워졌지만, 나폴레옹 몰락 후 빈 회의 결정에 따라 러시아 차르의 통치를 받게 됐다.

이처럼 폴란드는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을 되찾을 때까지 한 세기 이상 외세의 지배를 받았지만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1830~31년 폴란드 혁명도 민족독립을 위한 투쟁 가운데 하나였다. 1830년 11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혁명에 자극받은 일단의 사관생도, 대학생, 지식인이 중심이 돼 무장봉기를 일으켜 차르가 임명한 총독을 몰아내고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폴란드 혁명세력은 이듬해 10월까지 무장투쟁을 계속했으나 수적으로 월등한 러시아 군대를 당하지 못하고 결국 굴복했다. 민족독립의 시도가 좌절되자 많은 폴란드인이 러시아 군의 처형과 탄압을 피해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봉기를 진압한 러시아는 폴란드의 학교교육에서 폴란드 민족 전통을 억압하고 러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강요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조국의 고통과 슬픔 새 음악 장르로 승화

1830년 폴란드 혁명은 쇼팽의 생애에서 일대 전환점이었다. 당시 20세였던 쇼팽은 봉기 발생 일주일 전, 오스트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를 여행하기 위해 그가 태어나 성장한 바르샤바를 떠났다. 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던 그는 1831년 여행 중 혁명 좌절의 소식을 접하고 비분과 절망으로 크게 상심, 귀국을 단념하고 망명의 길을 택했다. 러시아의 지배가 계속되는 한 귀국하지 않기로 결심한 쇼팽은 죽을 때까지 조국의 땅을 밟지 못했다.

파리에 정착한 쇼팽은 남은 생애를 음악가로서 창작과 연주활동에 전념했지만 한시도 조국을 잊지 못했다. 열렬한 애국자로서 쇼팽의 면모는 그의 삶과 음악세계 면면에 두드러졌다. 쇼팽의 부친은 폴란드로 이주한 프랑스인이었으며, 쇼팽 자신이 파리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는 못했다. 연하(年下)인 쇼팽과 파리에서 10여 년간 동거한 여류작가 조르주 상드(G. Sand)에 따르면 쇼팽은 “폴란드보다 더 폴란드적”인 사람이었다. 파리에서 프랑스인, 독일인 등 많은 외국인 예술가와 교류하면서도 그는 폴란드어를 고집했다. 쇼팽이 남긴 수백 통의 편지는 모두 폴란드어로 쓰였으며, 그가 자신의 곡에 붙인 텍스트는 단 한 편의 예외도 없이 모두 폴란드어로 작성됐다. 쇼팽은 프랑스식 이름과 프랑스 여권을 사용했지만, 그것은 폴란드를 지배하는 러시아에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역할을 맡기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창작에 비해 공개적인 연주활동에 소극적이었던 쇼팽이 파리나 런던 등에서 망명 동포들을 위로하는 연주 행사는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쇼팽의 조국애는 그의 장례조차도 특이하게 만들었다. 쇼팽은 죽은 후 파리의 묘지에 묻혔지만, 그의 심장은 따로 고국으로 옮겨져 바르샤바의 교회에 안치됐다.

사실 조국 폴란드는 음악가로서 쇼팽의 영감과 독창성의 원천이었다. 특히 1830년 폴란드 혁명 좌절은 쇼팽의 젊은 영혼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 그의 음악세계 기저에 흐르는 낭만주의적 애상과 비극적 환상의 근원이 됐다. 음악을 통해 조국의 영광과 고통, 슬픔을 표현하고자 했던 쇼팽은 폴란드 고유의 민속 무곡을 마주르카, 폴로네즈 등 새로운 음악 장르로 승화시켰다. 특히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일명 ‘군대’ ‘영웅’을 포함해 그가 생전에 발표한 7편의 폴로네즈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 억압받는 폴란드의 민족적 전통과 문화를 기리려는 뜻을 담고 있다. 민족주의에 대한 쇼팽의 음악적 감수성은 당대뿐 아니라 후대의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체코의 스메타나(B. Smetana), 노르웨이의 그리그(E. H. Grieg) 등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음악을 추구한 음악가들에게 쇼팽은 선구자적인 존재였다.



주간동아 2010.03.16 727호 (p72~73)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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