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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교수의 5분 세계사

중국, 170년 전 ‘아편전쟁’ 치욕 갚다

외교 마찰 알면서도 영국인 마약밀수범 사형집행 단호한 응징

  •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중국, 170년 전 ‘아편전쟁’ 치욕 갚다

중국, 170년 전 ‘아편전쟁’ 치욕 갚다

중국 난징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편 중독에 대해 설명하는 여경. 손에 든 식물은 아편 재료인 양귀비로, 아편은 양귀비 즙액을 굳히거나 가공해 만든다.

지난해 연말 중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초기인 1951년 이후 처음으로 유럽인을 사형시켰다. 사형수는 중국 변경도시 우루무치에서 헤로인 4kg을 소지한 혐의로 체포돼 그동안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된 영국 국적의 마약밀수범이었다. 그런데 이 사형 집행이 영국과 중국 사이에 외교적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사형수 구명에 총리까지 나섰던 영국 정부는 중국의 조치에 대해 외교 경로를 통해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이에 중국 정부는 50g 이상의 헤로인 밀매 범죄를 사형에 처하도록 한 자국 형법을 들어 법 집행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한편 영국 측의 항의를 내정간섭 행위로 규정하며 반발하고 있다.

마약 문제로 중국과 영국 간에 갈등이 발생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세기 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약 때문에 양국이 갈등을 넘어 무력충돌에까지 이른 적이 있다. 1840~42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아편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종종 중국 근대사의 시점으로 여길 만큼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이 전쟁은 이름 그대로 아편이 원인이었다.

18세기 말 영국은 중국에 진출하고자 노력했던 구미(歐美) 열강을 제치고 중국과의 교역을 주도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에게 청나라와의 교역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차, 생사(生絲), 도자기 등을 수입하고 모직, 면직, 금속 등 공업제품을 수출하던 영국이 당면한 문제는 무역 불균형이었다.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는 중국 상품, 특히 중국산 차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였던 반면, 영국 공산품은 수공업이 발달한 중국에서 인기가 별로 없었다. 영국 상인들과 거래하던 중국의 공행(公行), 즉 청나라의 특허무역상들이 선호한 것은 은이었다. 영국은 이처럼 중국과의 교역에서 수입이 수출을 초과하고, 초과분을 메우기 위해 막대한 양의 은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을 부담스럽게 여겨 이를 타개할 방안을 모색했다.

淸과 무역수지 개선 돌파구로 ‘아편’ 선택

영국이 청나라와의 무역수지를 개선할 수 있는 대체상품으로 선택한 것이 아편이었다. 양귀비 열매에서 채취한 유즙으로 만든 아편은 중독성이 강한 마약이다. 중국은 아편을 명대부터 의약품으로 사용했으나, 지방에 따라서는 담배와 혼합해 흡연하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할 정도로 이미 18세기 전반에 아편 흡연 풍속이 널리 퍼져 있었다.



중국에서의 수요를 노리고 아편을 새로운 교역상품으로 개발하는 일은 인도 주재 영국 동인도회사가 떠맡았다. 이 회사는 18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인도에서 아편을 생산하고 이를 영국 상인들에게 넘겨 중국에 밀수출했다. 이렇게 동인도회사가 개입하면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아편의 양이 엄청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의약품용으로 매년 약 200상자(1상자는 60kg) 수입되던 아편이 1800년경에는 4000상자, 182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1만 상자, 1830년에는 2만 상자로 급증한 것이다.

변발을 한 중국인이 아편굴에 모여 아편을 피우는 그림은 밀반입되는 아편으로 중독자가 급격히 확산되던 청조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실제로 1830년대에 들어서자 빈부와 계층, 지역 구분 없이 아편 중독자가 약 200만명에 이르렀고, 심지어 군대 내에서도 아편 중독자가 급증했다. 청나라는 18세기 말부터 수차례 아편 밀매와 흡연을 금지하는 법령을 공표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부패한 관료가 아편 밀수를 묵인하는 탓도 있었으나 아편을 공급하는 영국의 태도가 문제였다.

아편 밀무역은 영국 본국과 식민지 인도, 그리고 중국을 잇는 19세기 대영제국의 삼각무역에서 포기할 수 없는 활력소였다. 영국 상인들은 아편 밀매를 통해 중국산 차 수입 대금을 조달할 수 있었고, 중국산 차 수입이 증가할수록 영국 정부의 다세(茶稅) 수입도 늘었다. 영국령 인도의 식민정부도 아편 재배에서 막대한 세수(稅收)를 거뒀고, 아편 생산에서 인도가 거둬들이는 수입은 영국 면제품의 수출시장을 확대하는 데 이바지했다.

반면 청나라의 경우 아편 밀매는 국가 경제와 정부 재정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동인도회사의 개입으로 아편 밀반입이 본격화하면서 다량의 은이 아편 대금으로 국외로 유출됐고 이에 따라 은값이 폭등했다. 이는 곧 일상의 통용화폐인 동전(銅錢) 대신 은(銀)으로 환산해 세금을 납부해야 했던 국민에게는 실질적 세 부담을 증대시켰고, 정부에게는 세수 확보의 어려움과 재정 감소를 초래했다.

1830년대 말 청나라는 국민 건강과 국가 경제를 피폐시키는 아편 밀매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판단, 임칙서(林則徐)를 광저우로 파견해 아편 밀수를 척결토록 했다. 엄격한 도덕주의자로서 청백리의 표상이던 임칙서는 아편 밀매를 뿌리 뽑기 위해 단호한 조처를 취했다. 영국 상인들을 압박해 2만 상자의 아편을 몰수했을 뿐 아니라 아편 밀매를 포기할 것을 서약하고, 청조의 법과 사법 관할권에 따르도록 한 것이다. 또한 그는 영국 여왕에게 서한을 보내 문명국가가 사람에게 해로운 물품의 밀매를 방치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청조의 엄정한 법에 따라 아편 밀매를 근절하겠다고 다짐했다.

임칙서 “문명국가가 아편 밀매 방치” 비판

임칙서를 앞세운 청의 강경 조치에 영국은 반발했다. 아편 밀매와 청나라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영국 의회와 여론에서 논란이 있었지만 정부와 의회는 결국 청나라의 조치를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결정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러한 결정에는 아편 밀매에 따른 경제적 이익에 대한 고려뿐 아니라 그동안 광저우에 국한된 청과의 교역을 자유무역의 형태로 개방하고 확대하기를 원하던, 오랜 희망도 아울러 작용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 의회의 젊은 의원이었으며 훗날 자유당 지도자로 영국 수상을 네 차례나 역임한 글래드 스턴에게는 아편전쟁보다 더 동기가 부당하고, 영국에 ‘영원한 수치’를 안겨준 전쟁은 없었다.

‘네메시스(복수의 여신)’호를 포함해 44척의 함선과 4000여 병력으로 무장한 영국 함대가 싱가포르에서 광둥 연안에 도착한 1840년 6월부터 양국 간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청나라 구식 군대로는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 세계 최강 영국 해군을 당할 수 없었다. 광둥에 이어 양쯔 강까지 진출한 영국군에게 상하이가 함락되고, 베이징으로 향하는 하상 운송로가 차단되자 청나라는 휴전을 요청하고 무릎을 꿇었다.

패전의 대가는 말 그대로 굴욕적이었다. 청나라는 1842년 난징조약을 통해 영국의 일방적 요구사항을 전면 수용했다. 청나라는 영국에게서 몰수한 아편과 전비(戰費)를 전액 배상할 뿐 아니라, 홍콩 섬을 할양하며, 광저우 외 4개의 항구를 추가로 개항하고, 개항지 조계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영국과의 조약은 곧 구미 다른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의 선례가 됐다. 미국과 프랑스도 잇따라 영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미 독립국가의 고유한 주권조차 제대로 지킬 수 없음이 드러난 청나라는 1844년 이들 국가와 각각 조약을 체결해 영국과 같은 최혜국 지위를 부여했다.

이렇듯 아편전쟁은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계사적 조류 속에 중국이 구미 열강의 반(半)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중국에게 아편은 외세에 의한 수모와 굴욕의 역사를 상징한다고 보면, 마약범죄를 일벌백계로 다스리는 중국 정부의 엄중한 태도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영국 출신 마약밀수범의 처형을 둘러싼 중국과 영국의 갈등은 역사가 연출하는 한 편의 역전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19세기 전반 아편전쟁 당시 영국은 역사상 최초의 산업국가로서 절정에 올랐던 국력을 배경으로 마약을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을 무력 응징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170여 년이 흐른 이제 그동안 영국을 대신해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이 아편전쟁의 치욕을 안긴 영국을 향해 마약에 대한 법의 응징을 단호히 고집하는 것이다.



주간동아 2010.01.26 721호 (p74~75)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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